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중국 송의 시인 방악(方岳)이 “당당히 가는 해를 누가 잡을 수 있으랴(歲堂堂去誰能守)”라고 한 말이 절로 실감 난다. 이제 한 해를 돌아볼 때다.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지사 곽종석(郭鍾錫) 선생은 1873년 섣달그믐에 ‘제석잡화(除夕雜話)’라는 글을 지어 한 해를 돌아보았는데, 마음을 끄는 대목이 많다.
“1년 360일은 정월 초하룻날에 시간을 보면, 무한한 세월이 있고 무한한 경계가 있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니, 그 사이 무한한 공부와 무한한 사업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곧장 넉넉하게 한두 시간을 보내고 하루 이틀 더 보내더라도 아직 많은 세월과 경계가 있어 일하기에 여유가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 때문에 여유만만하고 기세등등하여 새벽에 할 일을 아침으로 미루고 아침에 할 일을 낮으로 미룬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을 다시 그다음 날로 미룬다. 그저 미루는 일만 끊임없이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날이 가고 달이 가며 봄이 가고 가을이 오게 된다. 어느새 곧바로 섣달그믐날이 온다. 뒤돌아보면 지나간 세월과 경계가 눈 깜빡할 사이처럼 느껴지지만, 어떠한 공부나 자잘한 사업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뜨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남은 며칠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년회를 가진다. 원래 망년(忘年)은 나이를 잊는다는 뜻이다. 한 해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다시 거창한 새해 다짐을 하는 것, 나로서는 그리 하고 싶지 않다. 한번쯤은 나이를 잊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새해 다짐은 내년의 일로 미루고 그간 만나지 못한 가족과 친지, 벗과 이웃 사람을 만나 조촐한 모임을 갖는다면 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국가와 시대를 근심한 곽종석 선생은 이러한 뜻을 나보다 먼저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평소 대단히 힘을 기울여 몰두하는 사업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제각기 근심과 질병 때문에 곤욕을 겪으며, 사익을 도모하고 굶주림을 면하는 길에 붙들려, 소와 말처럼 분주하게 동으로 서로 설치고 다니느라 잠시도 한가하고 맑은 시절을 가진 적이 없다.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즐거운 명절과 아름다운 계절에 이웃이나 벗을 불러 모아 큰 사발에 막걸리 가득 부어 권커니 잡거니 하며 얼큰하게 취하여, 한 번이라도 활짝 웃은 적이 있던가? 이렇게 어영부영하다 보면 바로 섣달그믐이 되어버린다. 이제 한 해가 저물려 하는데 오늘 하루를 놓치면 올해는 끝내 활짝 웃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날은 책을 읽는 이는 책을 덮고 나무하는 이는 일손을 놓고 일체 세상사의 시비와 영욕을 모두 벗어던지고 등불을 밝힌 개울가 집에서 함께 둘러앉아 보자. 가족과 친척, 이웃과 벗들이 즐겁게 흡족하게 한바탕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활짝 웃게 되리라.”
하던 공부, 하던 일 제쳐두고 이러한 망년의 모임을 갖고 싶지 않은가! 그래도 한 해를 보내면서 한번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면 다시 곽종석 선생의 글을 보면 된다. 섣달그믐을 제석(除夕)이라 한다. 곽종석 선생은 ‘제석’을 무엇인가를 제거해야 할 저녁이라 정의한 다음 이렇게 적었다.
“제거하여야 할 것은 무엇인가? 분노를 반성하면 분노가 제거되고, 욕심을 막으면 욕심이 제거된다. 용모를 바르게 하면 포악하고 게으르고 간사하고 편벽된 기운이 제거된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면 번잡하고 허황한 잡념이 제거된다. 제거하고 또 제거하여 마땅히 제거해야 할 것을 모두 제거한다면 절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 절로 새로워지지 않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제야는 반성의 날이다. 올 한 해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나면 새로 맞는 한 해는 더욱 새로운 나날이 될 것이다. 이런 각오로 한 해를 맞는다면 스스로 마음이 조금 더 편하고 세상이 조금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