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구하라씨의 죽음에 얽힌 사회적 병리현상

입력 2019-11-26 04:03
사회의 여러 병리현상이 이처럼 한꺼번에 작용한 죽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연예인 구하라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은, 스물여덟의 말도 안 되게 젊은 나이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지난해부터 그가 겪어 온 일들을 떠올렸더니, 그동안 감내했을 고뇌를 상상했더니, 어렵지 않게 ‘결국…’이란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안전 이별’이란 신조어가 나올 만큼 헤어지는 연인의 현실은 로맨스를 벗어나 스릴러가 됐다. 구씨는 옛 남자친구를 성폭력과 협박, 강요 혐의로 고소해야 했고 법정 싸움을 벌여 왔다. 그러다 ‘리벤지 포르노’라 불리는 동영상의 존재가 그 남자로 인해 불거져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아이돌 가수가 된 뒤로 악성댓글에서 자유로운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잇따르면서 ‘악플러’들은 더욱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여러 차례 간곡히 호소도 하고 법적 대응도 했지만 지금 그의 사망을 전하는 기사에도 악플이 달려 있다. 그런 구씨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이상해 보일 수 없었다. 찾아왔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세상이 그를 우울증에 몰아넣었고, 그 증상은 지난 5월 구씨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자살은 질병이다. 전염되고 재발한다. 그와 가까웠고 역시 악플에 시달렸던 연예인 설리가 지난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40일 만에 벌어진 구씨의 비극은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르는 ‘자살의 전염’이면서, 실패했던 선택에 다시 빠지고 마는 ‘자살의 재발’이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판단이 안 설 만큼 이 젊은이의 죽음은 사회에 많은 숙제를 남겼다. 살인행위나 다름없어진 악플을 뿌리 뽑아야 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불법 영상 유포를 근절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살이란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일이 급하다. 가장 뼈아픈 것은 구씨가 보냈던 극단적 선택의 신호에 우리 사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설리의 비극을 보고도 충분히 예방하지 못해서 자살의 재발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성경은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라”고 했다. 지금 피투성이인 이들이 구씨의 죽음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이 내 주변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그들을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