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권위라는 말은 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개인 인권이 강조되면서 학교, 직장, 심지어 가정에서도 권위적 관계는 붕괴되고 수평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자리를 잡아갑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관계로 바뀐다는 점에서 이런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위를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보면 순종이란 기독교적 가치도 덩달아 설 자리를 잃습니다. 사회나 가정을 유지해 나가는 데 있어 긍정적 의미의 권위는 필요합니다. 이제 ‘강성 권위’(Hard Authority)에서 ‘연성 권위’(Soft Authority)로, 지위나 강제에 의해 주장하는 권위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권위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인류 최초의 죄: 불순종
요즘 젊은이에게 권위에 순종하라고 충고한다면 달갑게 받아들일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성품임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 1:19)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또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며 하나님이 순종을 가장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인류가 저지른 최초의 죄는 살인이나 도둑질, 우상숭배가 아니라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최초의 죄였습니다. 이들의 불순종이 모든 죄를 낳는 씨앗이 됐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지만, 하나님 뜻에 의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롬 5:19)
부여하는 권위에 자발적인 순종
권위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지위나 서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부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생과 제자, 선배와 후배, 고용주와 피고용인처럼 이미 결정돼있는 수직적 관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을 무조건 따르는 것을 순종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권위는 상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게 아닙니다.
상대의 생각과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부여받는 권위’가 있음을 예수님이 몸소 가르쳐 주십니다. 죄인 병자 세리같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신분이 낮고 천대받던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항상 따뜻하고 공평하게 대했습니다. 당신이 스승이면서도 제자의 발을 손수 씻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지만, 이 땅에서 결코 수직적 권위를 내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분께 커다란 권위를 부여하고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출애굽 광야 학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배운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복을 받았고, 불순종할 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인생의 정확한 방향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인생길을 살아가면서 창조주이자 구원자 되는 하나님께 최고의 권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우리를 얽어매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문제에서 해방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순종을 위한 신뢰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깊이 관련되는 성품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 된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기도의 중요한 목적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뜻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습니다.
진정한 순종은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녀가 부모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삶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순종은 사라져야 할 옛 관습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성도가 반드시 키워나가야 할 소중한 성품입니다. 순종의 거룩한 미덕이 성도들의 삶의 자리에서 더 크게 자라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