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환의 시대인가. 고(故) 이영희 선생이 분단으로 고립된 한반도에 ‘데탕트’ 시대가 오고 있다고 역설했던 1970년대처럼 세계질서는 요동치고 있다. 탈냉전 이후 40년 가까이 유지됐던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집권 이후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 내 석학들조차 ‘이게 다 트럼프 때문’이라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애초부터 결함을 안고 있었고, 극단적 세계화가 불러온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이 ‘트럼프 현상’을 낳은 씨앗이 됐다는 것이다. 결정타는 중국이다.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에 참여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려고 군사·외교력을 키우면서 기존 질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퇴조는 트럼프 집권기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중국의 일취월장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국내외에서 나온 전망을 종합하면 중국을 주저앉히기 위한 미국의 공세가 자국의 단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른 결과물인 불확실성 확산과 투자 위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국가 중 한 곳은 한국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 미·중 무역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수출은 타격을 받고 있고,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라는 도발까지 더해져 피해를 키우고 있다.
안보·외교 분야의 위기감은 더 크다. 패권 도전에 나선 중국을 뿌리치기 위해 미국은 과거 소련에 그랬듯이 폭넓은 반중국 연대망을 구축해 굴복시키려 할 것이다. 이미 사드 배치 사태로 한차례 곤욕을 치렀던 우리나라는 다시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노골적인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 선택이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타격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조국 정국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달 초 문재인 대통령은 태국 미얀마 라오스를 순방했다. 이로써 문 대통령은 임기 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을 모두 방문한 첫 대통령이 됐다. 정부는 이번 순방을 통해 신(新)남방정책의 기반이 다져졌고,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양국 관계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아세안과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대국(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수준으로 격상시키겠다는 복안도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임기가 절반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10개 국가 순방을 모두 마칠 정도로 아세안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언뜻 경제적인 이유로 보인다. 연평균 경제성장률 6%, 인구 6억5000만명, 평균연령 30세로 성장잠재력이 큰 아세안 시장에 중국 일본보다 뒤늦게 뛰어들었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지 정부·지역사회와 신뢰 구축의 시간도 없이 중국으로 몰려갔던 기업들 중 상당수가 실패를 맛본 전례를 고려하면 서두르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 점을 정부도 모를 리 없다.
정부의 신남방정책 추진은 통상차원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국제정세와 연관이 더 크다고 보는 게 맞다. 미·중 충돌에 따른 부담, 외교·안보상의 불확실성을 공통으로 겪고 있는 아세안 같은 지역 국가들과 힘을 합치는 게 각자도생 전략보다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에다 아세안 국가들 모두 남북 동시 수교 국가들이며 남북 모두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세력이라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즉 비핵화 이후 북한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격차가 큰 선진국보다 아세안 국가들이 벤치마킹 모델로 활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오는 25일 ‘미·중·일 넘어 신남방벨트로’를 주제로 열리는 국민미래포럼이 국제질서 전환시대에 한-아세안의 바람직한 협력관계를 모색하는 생산적인 자리가 됐으면 한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