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여성-되기

입력 2019-09-19 00:02

“그래서 제가 엄마의 자리로 가보았거든요. 엄마랑 동선을 같이 해 보았어요. 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도왔고요. 그랬더니 보이더라고요.”

스물일곱 살 된 젊은이가 신바람이 났다. 자랑스럽게 빨래 널어놓은 사진도 페이스북에 함께 올렸다. 사연인즉 이렇다. 지난여름 ‘성서한국’ 전국대회 강의를 듣고 그대로 실천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너의 의미, 사이-공동체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사회적 배치에 관한 이야기를 풀었던 터였다. 특히나 5000년 가부장제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의 배치와 역할은 여성 스스로가 주체로서 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강조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사흘에 한 번씩’ 매로 다스려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근대 사회에서는 지켜줘야 하는 사랑의 대상인 ‘너’로 응시됐지만, 한 번도 ‘나’였던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고 말이다.

“만약 여성 배치가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었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이니 이런 사상을 배우는 것이 영 불편하다면요. 그런 것 다 관두고 그저 내 삶의 영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성의 자리로 가보세요. 그리고 그녀가 너무나 ‘당연하게’ 하는 일을 함께 해보세요. 그것이 여성-되기입니다.”

그 제안을 진심으로 가슴에 담은 부산 청년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신의 배낭을 받아 드신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수련회 동안 구겨 넣어 가져온 땀투성이 밀린 빨래부터 꺼내셨다. 함께 화장실 한구석에 앉아 어머니와 함께 빨래를 하기 전까지는 어머니께서 늘 아들의 옷을 손빨래하시는 줄 몰랐다고 했다. 구부려 앉으니 피도 안 통하고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흘러나왔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혼자 할 때는 힘들더니, 함께하니까 좋구나.” 아들만큼이나 어머니도 큰 깨달음을 얻으신 날이었다. 으레 혼자 하는 일로 알았던 일을 함께하는 기쁨을 경험하셨으니 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택한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전근대든 근대든 사회제도가 제한한 자리 말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자리, 거기서 나의 의미를 찾고 살아가는 주체적 삶이 여성에게도 열려있음은 이미 예수께서 인정하셨다.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창조적 주체라는 선포는 아예 창조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다만 무언가를 지을 수 있는 인간 능력은 사회제도를 만들었고, 이때 힘 있는 ‘나’들이 자신들의 의미만을 담아 배치한 공동체적 삶은 자꾸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는 결코 ‘나’들의 의미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역사상 ‘너’였던 사람들, 같이-살기의 방식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배치를 결정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의 의미가 함께 반영돼야 그 공동체는 비로소 관계적 혁명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남자는 여성-되기를 통해, 백인은 유색인종-되기를 통해, 고용주는 노동자-되기를 통해 비로소 우리의 공동체적 삶에 무엇이 배제됐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거다.

추석 연휴가 막 끝났다. 올해는 명절 직후 가정불화를 다룬 기사가 부쩍 줄어든 듯하다. 어쩌면 세상이 많이 변해 전근대적 방식으로 성별이 배치된 추석 나기가 그친 가정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아직도 명절 가사 노동은 며느리로 배치된 여성의 몫이다. 반나절 넘게 기름 앞에서 전을 부치다 보면 식욕도 없어지고, 결국 전은 ‘부치는 사람 따로 있고 먹는 사람 따로 있는’ 애증의 음식이 된다. “제대로 된 전통에서는 남자들이 전을 부쳤어요.” “먹지도 않는 칼로리 덩어리를 왜 그렇게 많이 부쳐야 하는 건가요.” 이런 불평은 가족이 공동체로 성장하는 데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 해의 수확으로 만든 넉넉한 밥상에 가족이 둘러앉아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귀한 전통을 아예 없앨 필요는 없다. 다만, 설 명절부터는 당장 실천해봐도 좋겠다. 익숙했던 나의 자리를 떠나 너의 자리로 가보는 것 말이다. 너와 함께 일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실천하셨던 ‘약자-되기’의 삶이 그러하기에.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