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용어가 불황의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 국채의 장·단기 금리 역전현상이 두드러지면서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급부상했다. 통상 채권금리는 단기물보다 장기물이 더 높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앞날의 경제 상황을 나쁘게 전망할 때는 장·단기 금리 차가 줄어든다. 심한 경우에는 역전 현상도 일어나는데 미국이 요즘 그런 상황이다.
‘D(Deflation·디플레이션)의 공포’도 등장했다. 지난달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역대 최저치인 0.0%를 기록하면서부터다.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겹치면서 저물가 장기불황이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반영됐다. 그런가 하면 일본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만 보였던 마이너스(-) 금리가 확산하면서 ‘M(마이너스)의 공포’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금리와 경제성장률, 물가 등 각종 경제지표의 추락에 대한 걱정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달 들어서는 일본형 장기불황, 즉 ‘J(Japanification·재패니피케이션)의 공포’ 얘기가 줄곧 오르내린다. ‘일본화’를 뜻하는 재패니피케이션은 199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일본의 장기 경기침체를 일컫는다. 최근 들어 수출이 9개월 연속 줄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해 들어 7개월 연속 0%대에 머물다 8월에는 마이너스대(-0.04%)로 떨어진 한국 상황이 ‘J의 공포’를 부추기고 있다.
경제지표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공포에 대해 정부도 일부 수긍하는 모양새다. 다만 ‘J의 공포’에 대해선 선을 긋는다. 한마디로 지금의 국내 상황이 일본형 장기불황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저물가는 수요 쪽보다는 공급 측에 요인이 많고, 내년 즈음에는 물가상승률이 1%대로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정부 측 입장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화차’엔 빚더미에 놓인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녀는 타인의 신분을 훔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 소설 속 배경은 1990년대 초반인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막 시작되는 시점이다. 당시 일본은 1989년 말 고점이었던 주가가 3년도 안 돼 반토막이 나고 도쿄 등 대도시의 부동산 가격도 폭락했다. 서민들은 카드빚과 신용불량, 개인파산 등으로 고통받던 시기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높은 자살률, 고령화, 고독사 같은 어두운 뉴스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던 때이기도 하다.
정부·여당 입장에선 ‘J의 공포’ 운운이 영 달갑지 않을 것이다. 장기불황은 국가 미래와 국민 부담이 직결되는 사안이다. 뿐만 아니라 내년 총선과 향후 정권재창출의 성패 여부까지 맞물리는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민간에선 “이미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일본이 장기 경기침체에 빠지게 된 요인으로는 성장률의 지속적인 하락, 빠른 고령화,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이 꼽힌다. 지표상으로 보면 한국의 성장률은 2010년 6.8%에서 지난해 2.7%까지 추락했다. 올해는 2%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전망이 많다. 물가상승률의 경우 일본은 1992년 3.4%에서 1995년 마이너스 물가(-0.1%)를 기록했다. 한국은 1965년 통계 작성 이래 지난달 처음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보였다.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일본은 고령화사회(65세 이상 비율 7%)에서 고령사회(65세 이상 비율 14%)로 바뀌기까지 24년이 걸렸는데, 한국은 17년 만에 진입했다.
더 걱정스러운 건 정부의 대응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장기 경기침체에 빠지게 된 실책 가운데 하나로 정책 실패를 꼽는다. 단기적인 경기 회복에 치중한 소극적 대응이 패착이었다는 것이다. 잇따른 경기침체 우려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책도 지금까지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경제 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외침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불황의 전주곡은 이미 흐르고 있다. 정부 대응이 늦지 않기를 바란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