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행정장관이 지난 4일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철회를 선언했지만 홍콩 시위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송환 철회 후 첫 주말에도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빚어졌다. 일부 시위대는 지하철역 유리창을 부수고 출입구에 불을 지르기도 하는 등 과격 행동을 이어갔다. 시위대는 송환법뿐 아니라 행정장관 직선제 등 모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홍콩 시위대는 8일 오후 홍콩주재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홍콩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집회’를 열고 미 의회가 논의 중인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시위 주최 측은 오후 1시30분부터 홍콩섬 센트럴역 근처 차터가든에서도 같은 내용의 집회를 열고 미국 총영사관까지 거리행진에 나섰다.
일부 시위대는 오후 5시40분쯤 센트럴역 부근 길에 종이 등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고, 곧이어 센트럴역의 한 출입구도 시위대가 불을 질러 화염에 휩싸였다.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진화했으나 센트럴역은 폐쇄됐다. 센트럴역의 외부 유리창은 산산조각났고, 완차이역 내부에도 부서진 유리창이 눈에 띄었다.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경찰이 해산에 나서자 시위대는 완차이를 거쳐 코즈웨이베이 쪽으로 이동하면서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여러 차례 쏘기도 했다.
앞서 집회가 열린 차터가든 주변에서는 시위대가 무더기로 미국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트럼프 대통령, 홍콩을 해방시켜주세요’라거나 ‘우리를 짓밟지 말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도 보였다. 차터가든에 나온 캐빈(30)은 “홍콩 인권법안이 통과되면 미국이 홍콩 정부를 압박해 우리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트럼프 정부가 법안의 원래 의도대로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SCMP에 말했다.
미 의회에서 지난 6월 발의된 홍콩 인권법안은 미국이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해 비자나 법 집행, 투자, 무역 등에서 홍콩에 특별 지위를 계속 부여할지를 결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날인 7일에는 검은 옷을 입은 시민 수백명이 몽콕 지역의 프린스 에드워드 전철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전철 운영사인 MTR이 역을 폐쇄하자 근처 몽콕 경찰서 앞 도로를 점거했고 일부 시위대는 물건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프린스 에드워드역은 홍콩 경찰이 지난달 31일 최정예 특수부대인 ‘랩터스 특공대’를 지하철 객차 안까지 투입해 63명을 체포했던 곳이다. 당시 경찰은 지하철역 안에서 곤봉 등으로 시민들을 마구 때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부상자들의 병원 이송에 3시간이나 걸린 데다 역사 진입을 거부당한 응급요원이 “부상자들을 구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호소하는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경찰이 부상자 치료를 거부했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또 당시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시민 3명이 숨졌다는 소문이 퍼지는 등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고 있다. 일부 시민들은 전철역 입구에 조화를 놓고 경찰 폭력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해당 사망설을 부인했다.
홍콩 경찰은 이날 ‘우산 혁명’의 주역이자 송환법 반대 시위를 이끌어온 조슈아 웡을 다시 체포했다. 웡은 대만을 방문해 홍콩 민주화 지지를 호소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시위를 주도해온 민주인권전선은 오는 15일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는 등 시위가 더욱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