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사회 테러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새로운 테러범들은 이질적인 존재들에 의해 대체될지 모른다는 공포, 이질적인 존재들로 인해 자신들의 공동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테러는 투사의 사명감을 띤다. 이대로 놔두면 완전히 망가져버릴지 모르는 공동체를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그들의 사투는 잔혹하고 위험하다.
새로운 테러범들의 왜곡된 정의는 ‘백인민족주의(화이트내셔널리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미국 수사 당국은 지난 3~4일(현지시간) 텍사스주 엘패소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연이틀 발생한 대규모 총기난사 사건을 백인민족주의에 심취한 이들이 저지른 테러로 보고 수사 중이다. 한때 잔혹한 테러로 서구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백인민족주의자들이 대체하며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외로운 늑대’, 백인민족주의 만나다
백인민족주의는 ‘백인’이라는 인종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하에 백인이 아닌 이민자와 난민들을 외부 침략자로 보는 이념이다. 백인민족주의자들은 백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외부 세력으로 인해 오염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일에 집착한다. 주류 사회는 당연히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공유한다.
백인민족주의자들에게 혼혈과 다문화, 유색인종의 이민, 백인의 낮은 출산율은 ‘백인 국가’를 위협하는 적이다. 백인민족주의를 내재화한 총격범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외부 적에 대한 섬멸로 정당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과거의 총기난사 사건들과 달리 최근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들은 히스패닉과 유색인종 등 특정 집단을 목표로 한 증오범죄가 많았다.
엘패소의 월마트 매장에서 총기를 난사해 22명을 사망케 한 21세 백인 청년 패트릭 크루시어스는 범행 직전 극우성향 온라인 게시판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4쪽짜리 성명서를 올렸다. 그는 자신의 공격을 히스패닉의 텍사스 침공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규정하며 백인우월주의를 찬양했다.
미 연방수사국(FBI)도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폭력이 늘어나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FBI는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 850건 중 40%가 인종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됐으며 이 중 대다수는 백인우월주의와 관련 있다고 밝혔다.
FBI의 대테러 책임자인 마이클 맥개리티는 최근 미 의회에서 “근래 몇 년간 인종주의에 기반한 개인의 테러가 이슬람 극단주의와 관련된 테러 사건을 능가하면서 국내 테러에 대한 접근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총기를 사용하는 외로운 공격자들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며 “이들이 치명적인 국내 테러범들을 대표하는 지배적 추세가 됐다”고 지적했다.
영국 가디언은 “백인민족주의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인종주의 활동가들은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해 백인 청년들을 급진화시키고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 능숙하다”고 분석했다. 프랑스의 인종주의 작가 르노 카뮈가 저서인 ‘대교체(The Great Replacement)’에서 제기한 음모론도 트위터 등 온라인을 통해 거세게 번져나가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의 이민으로 백인이 자국에서 소수로 몰락한 뒤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음모론은 현재 미국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중 히스패닉이 백인보다 많은 실제 인구학적 변화와 결합돼 젊은 백인들을 선동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사상이 디지털 플랫폼에 익숙한 백인 청년들 사이로 번지며 외로운 늑대들을 사상적으로 중무장하게끔 만들고 있다.
‘증오의 녹색화’, 환경주의라는 명분
새로운 테러범들이 명분으로 삼는 또 다른 사상적 조류는 ‘에코파시즘’이다. 엘패소 총격범 크루시어스가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지난 3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사원 테러가 대표적이다.
이슬람사원 두 곳에서 총기를 난사해 51명을 숨지게 한 호주 출신 총격범 브렌턴 테넌트(28)는 자신의 정체성을 ‘에코파시스트’로 규정했다. 그는 이민자들의 출생률에 격노하며, 그들의 높은 출생률이 인구 과잉을 낳고 결국 환경오염을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엘패소 총기난사범 크루시어스도 성명서에서 “수질 오염, 플락스틱 쓰레기, 미국 소비자 문화가 미래 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며 비슷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그간 좌파 진영의 이념적 자산으로 여겨졌던 ‘환경주의’를 사상적 토대로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에코파시즘은 ‘환경 및 동물권 보호’라는 명분하에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전체주의적 성향을 띤다. ‘혈통과 토양’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정화하기 위해 외부 불순물(타인종)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나치 정권이 대표적 사례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두 사건을 설명하며 벳시 하트만 햄프셔대 교수가 ‘증오의 녹색화’라고 정의한 에코파시즘의 극단적 사례라고 분석했다. 많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현재 자연보호와 인종 배제 사이의 연관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환경주의에 천착하고 있다. 주류 환경운동은 사회정의와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지만, 물밑에서는 극우주의자 단체들이 ‘녹색 메시지’를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삼기 위해 애써온 것이다.
‘트럼프라는 원죄’, 증오 부추기는 정치
백인민족주의 등 극단적 인종주의와 그 옹호세력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을 전후해 폭증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백인민족주의 테러를 무분별한 폭력 정도로 간주하지만 전문가들은 증오범죄가 선거 등 중요 정치 이벤트와 함께 폭증한다고 주장한다. 백인민족주의 테러의 대다수는 주류 사회에서 이민과 난민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격화될 때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선 선거과정에서 백인민족주의 언어를 주류 정치에 도입한 트럼프 대통령은 테러 확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취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강경한 반이민정책을 주창하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고 있다.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으로 묘사했고, 남쪽 국경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침략자로 표현했다.
아메리칸대의 신시아 밀러 이드리스 교육사회학 교수는 “침략이나 침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정치인들이 있을 때,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더욱 합법적인 것이라고 여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테러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느끼고 있지 않다. 그는 연이은 총기난사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정신질환이 있는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