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세계장애인 선교 ‘미국 전진기지’ 만들기 위해 유학

입력 2019-08-21 00:05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왼쪽)가 1992년 6월 미국 워싱턴DC 근교 겟세마네 기도원에서 진행된 미주밀알선교단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미국 유학을 막연하게나마 꿈꿨던 것은 총신대에 입학해서부터였지만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밀알선교단을 만들고 나서부터였다. 굳이 미국에 가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장애인선교를 효율적으로 감당하려면 신학만 갖고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사회복지 현실은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라 기왕 공부를 할 바에야 그 분야에서 가장 발전된 미국에서 하고 싶었다. 둘째는 밀알을 창립할 때부터 가졌던 세계장애인 선교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미국에 전진기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 가는 일이 어디 옆 동네 가는 것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해 많은 준비가 있어야 했지만 내겐 아무것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공항에 마중 나와 줄 사람도 없었다. 아내를 포함해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미국행을 반대했다. 돈도 지인도 없는 미국 땅에 시각장애인이 혈혈단신 떠난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해 보였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정말 겁나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마음으로 떠나기 전날 밤 밀알 사무실에서 비장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미국이라는 넓은 대륙이 제 무덤이 된다 해도 가겠습니다. 제게 주신 사명을 기필코 이루도록 인도하옵소서.’

1984년 7월 15일 저녁, 나는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걱정했던 대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단체를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버티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처음 한두 달은 거의 매일 울면서 미국에 온 것을 후회했다. 밤이 되면 내일이라도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꾸렸고 아침이면 그래도 며칠 더 견뎌보자 하는 마음으로 짐을 풀었다.

되돌아보면 밀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지 못한 내 어리석음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들을 이루시려고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고 결국 다 이뤄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참 희한한 방법으로 필라델피아밀알 창립을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처음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대 입학 허가를 받아 유학을 갔고 85년 1월 학기부터 그 대학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정식으로 공부를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해 한 달쯤 지난 84년 9월에 공부를 시작한 학교는 엉뚱하게도 PCB(Philadelphia College of Bible)라는 신학대였다.

이 총재(두 번째줄 오른쪽)가 2003년 3월 1차 북한 평양방문 당시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40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 대학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전격적으로 편입을 한 것이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템플대 대학원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늦은 유학인 터라 대학 과정을 다시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 길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대학을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 길이 너무 좋은 길이었다.

그 대학은 모든 학생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교회나 지역사회에서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어디든 봉사할 곳을 찾아야 했다. 85년 2월 아내가 미국에 왔고 그때부터 나가게 된 교회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삼일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봉사를 해 보려고 담임목사님께 부탁을 했다. 역시 한국에서와 같은 이유,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85년 9월부터 교회 청년부를 맡아 전도사로 사역하게 됐다.

원래 그 교회에는 청년부가 구성돼 있지 않아 내가 만들어서 사역해야 했다. 물론 최선을 다해 봉사했고 덕분에 부흥도 뒤따랐다. 감사하게도 청년들 대부분이 나를 좋아해 줬다. 미국 생활 가운데 비로소 나를 따라주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교회 사정상 사역 기간은 1년여에 불과했지만, 청년들과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외로운 미국 생활에서 그들은 나의 위로이자 힘이었다. 그들이 필라델피아밀알을 만드는 데 큰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2년 만에 PCB를 무사히 졸업하고 템플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해 한 학기를 마쳤을 때 잠시 내려놨던 ‘씨앗 마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알게 된 모든 사람에게 밀알을 소개해 왔었고 미국에 있는 장애인들은 물론 세계 장애인 선교를 위해 미국교회들도 나서야 한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사람들에게는 매월 꾸준하게 한국에서 붙여온 밀알보를 전달했고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머지않아 미국에도 밀알을 조직할 것이라고 얘기해 왔다.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필라델피아밀알을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마침내 87년 2월 5일 역사적인 필라델피아밀알 창립모임이 개최됐다. 필라델피아밀알의 처음 이름은 ‘한국밀알선교단 재미후원회’라고 붙였다.

이재서 박사

필라델피아밀알은 주로 한국밀알선교단을 지원하는 것으로 사업을 펼쳤다. 물론 필라델피아 지역뿐 아니라 미국 여러 곳에 있는 장애인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도 많이 했지만, 특히 한국밀알선교단에는 매월 후원금을 보냈고 한국밀알선교단 최초의 컴퓨터를 사서 보내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와 있는 시각장애인 20여명을 필라델피아에 초청해 신앙 향상을 위한 수련회와 위로회를 개최했고 다른 지역에 새로 세워지는 밀알 지부들을 위해 물질적 지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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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