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군용기의 독도 영공 침범 사건을 놓고 러시아가 침범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있어 논란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는 25일 러시아 측과 국장급 실무협의를 열어 영공 침범 증거자료를 전달했다.
국방부는 한·러 국장급 실무협의가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1시간30분가량 진행됐다고 밝혔다. 우리 측에서는 이원익 국방부 국제정책관이, 러시아 측에선 니콜라이 마르첸코 주한 러시아 무관부 무관대리(공군 대령) 등이 참석했다.
국방부는 “이번 협의에서 러시아 군용기의 우리 영공 침범 사실을 확인해주는 증거자료를 제공하고 관련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며 “러시아 측은 자국 국방부에 이 자료를 즉시 보내 진행 중인 조사에 적극 참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제공한 자료에는 지난 23일 독도 인근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를 군 레이더로 포착한 항적 자료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A-50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했을 때 우리 공군 KF-16 전투기가 발사한 플레어(대공미사일 회피용 조명탄) 사진과 레이더 영상, KF-16과 F-15K의 디지털비디오레코드(DVR), 전투기 조종사의 경고사격 음성기록 등을 확보했다. 군 당국은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 측에 영공 침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재발 방지를 촉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무협의에 참석한 러시아 무관은 영공 침범 여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제시한 자료를 본국에 전달하겠다. 본국에서 자료를 확인할 것”이라는 반응만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의 전날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윤 수석은 러시아 측이 기기 오작동으로 계획되지 않은 지역에 진입했다며 이번 사태에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윤 수석 주장이 실제와 다르고, 러시아는 자국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한 사실을 확인한 바도 없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다. 기존 러시아 정부의 입장을 거듭 밝힌 것이다.
영공 침범을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양욱 국가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은 “러시아는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고, 한국도 항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출구가 마땅치 않은 싸움”이라며 “이번에 갈등을 잠재운다고 해도 앞으로 러시아와 중국이 계속 이 지역에서 비행할 것이 분명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중·러 군용기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무단 진입은 한·미·일 안보협력의 실체를 점검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많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러가 이번에 KADIZ를 무단 진입한 것은 한·일 관계가 악화됐을 때 한·일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미국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는지 비교해보기 위한 목적도 있다”며 “이번에 우리가 주권 차원에서 단호한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한 외교 소식통은 “정부나 군 당국이 러시아 군용기의 동해 인근 초계비행 항공로를 제시하는 방안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나서서 하늘길을 내줬다는 국내적 비판과 중·러를 견제하는 미국을 감안하면 선택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최승욱 손재호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