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일본 교회의 ‘조선 문명화’ 시도 꾸짖다

입력 2019-06-28 19:14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마을이 보이는 산언덕. 멀리 후지산이 보인다. 다쿠미는 야마나시현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지난 14일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北杜)라는 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아사카와 노리타가·다쿠미 형제 자료관’에 들르게 됐다. 그 지역 명소였으므로 방문한 것이다.

아사카와 다쿠미 (1891~1931)

그곳에서 아사카와 다쿠미를 만났다. 지난해 7월 ‘조선 고아의 아버지’라는 소다 가이치(1867~1962)를 취재하면서 그가 다쿠미 고별예배에 참석, 너무 이른 나이에 하나님 품에 안긴 그리스도인 다쿠미를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자료를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소다는 경성보육원(현 서울 후암동 영락보린원)을 설립하고 한국에서 생을 마쳤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다.

1931년 4월 4일 임업시험소(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치러진 다쿠미 고별예배. 아래 사진은 이문동 공동묘지 안장 후. 맨 오른쪽이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에서 다쿠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서울 ‘망우리공동묘지’가 생각났으며 ‘홍릉 임업시험소’ ‘조선백자’ 단어가 머릿속에 튀어 올라왔다. 민예연구가로 조선의 민예품을 지켜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와 둘도 없는 동지 다쿠미. 야나기는 다쿠미와 함께 일제의 광화문 철거를 막아낸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다쿠미 임종 직전 전보를 받고 교토에서 급히 조선으로 향하나 별세한 이튿날 도착했다. 그는 고별예배에서 우인 대표로 인사말을 한다.

고향 야마나시의 두 형제 자료관.

자료관은 조선 사람과 조선의 민예를 누구보다 사랑한 두 형제의 고향 기념관이다. 노리타가(1884~1964)는 조선미술전에 입상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으며 야나기, 다쿠미 등과 함께 조선민족미술관(당시 경복궁 집경당) 개관을 주도했다. 형은 조선 청자를, 다쿠미는 조선백자를 연구했다. 이들 형제의 미술사적 위치는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정양모 전 문화재위원장도 헌사를 마다치 않는 인물이다.

자료관 내 다쿠미의 임업 조사 형상물.

세리·기생도 존경한 조선의 일본성도

다쿠미는 1907년 야마나시현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 게이가 믿음이 좋았다.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 땅에서 왜 한국인과 한국의 예술을 사랑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사랑 실천이 국경, 민족, 이념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다쿠미 전기작가 에미야 다카유키는 “그리스도교적 수난과 고통을 겪고 있는 조선과 조선 사람에 대해 다쿠미는 깊은 사랑으로 대했다”고 말한다. 긍휼이었다. 어느 날 다쿠미가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정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 그리고 박애.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라기보다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형 노리타가와 함께한 다쿠미(오른쪽).

현립 농림학교를 졸업한 다쿠미는 지역 영림서에 근무하다 1914년 형 노리타가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취직해 청량리 임업시험소(현 국립산림과학원)에 근무하며 조선 생활을 시작했다. 형은 남대문심상소학교 훈도(교사)였다.

형제는 서울 회현동 경성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일기에 ‘조선의 현재 상황과 일본의 미래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인류는 방황하고 있다. 교회의 방황을 보고 있으면 두렵다’고 적었다. 그 무렵 일본감리회는 ‘복음화 문명화’라는 선교 사명을 띠고 있었고 이를 조선에도 적용하려 했다. 한데 다쿠미는 일본식 문명화를 조선에 이식하려는 재조선 일본교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 일기 곳곳에 “하나님의 목소리,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면 된다”고 적은 것도 당시 교권 정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다쿠미를 연구한 이병진 세종대 교수의 얘기다.

한편 1910년 일제강점 전까지 조선의 산림은 무주공산, 즉 산은 공동이용지로 개인 소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제는 산림법을 공포해 공동이용의 권리를 빼앗고 친일파와 조선인 지주에게 양여(讓與)했다. 새 지주들은 군용 산림 수요를 대기 위해 남벌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이 솔잎이라도 거둬가면 엄하게 벌했다. 다쿠미는 산 관리인에 잡혀 호된 질책을 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고 슬퍼했다. ‘도벌, 채취자의 형벌이 엄할지라도 산은 푸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향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판임관으로 산림 보호에 힘썼다. ‘조선 소나무 노천매장 발아촉진법’은 그가 개발했다.

형제는 1916년 야나기가 조선을 방문하자 백자 항아리를 보여줬다. “이렇게 멋진 청자와 백자를 보여준 두 형제에게 감사하다”고 그가 말했다. 형제의 조선 민예품 연구는 계속됐다. 도예가 도암 지순탁(1912~1993)은 심부름을 하며 그들을 도왔다. 문부대신 아베 요시시게(당시 경성제대 교수)는 ‘인간의 가치’라는 글에서 다쿠미와의 우정을 논했다. 그가 말한 ‘인간의 가치’는 다쿠미의 긍휼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다쿠미는 첫 아내를 잃었다. 5년 후 야나기 중매로 재혼했는데 아내가 출산 두 시간 만에 아이를 잃었다. 다쿠미는 ‘천사의 인형’이라고 이름을 지어 묻어야 했다. ‘나는 시종 기도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조선에 아이의 묘를 만들게 된 것이 정말 잘한 일 아닌가 하고…’ 일기에 적었다.

한복 입고 조선인 위해 싸우던 신앙인

다쿠미는 산림녹화에 열정적이었고 그때마다 기도로 출장에 따른 안전을 간구했다. 조선 인부와 일했고 그들과 어울려 조선 여흥을 배웠다. 같은 일본인마저 조선 사람으로 알고 무시하곤 했다. 행상인, 세리, 기생, 심지어 청량사 비구니도 다쿠미의 친구였다. 다쿠미가 이문동 공동묘지에 묻힐 때 “이들이 서로 관을 매겠다며 줄을 이었다”고 아베가 회상했다.

서울 망우리 다쿠미의 이전 묘.

지난 22일 서울 망우리공동묘지(정식 명칭 ‘망우역사문화공원’). 잘 정돈된 다쿠미 묘소를 찾았다.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힌 유해는 마을이 확대되면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됐고 해방 후 일본인 묘라 하여 파묘 직전까지 갔으나 그의 사랑의 실천을 알고 있는 이들의 증언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가 없어 유실 직전에 이르자 1966년 한국임업시험장 직원들이 이를 정비하고 묘비를 세워 기렸다.

다쿠미는 하나님을 섬기며 17년간 조선에서 살았다. 그가 사경을 헤매자 채소장수 행상 노파가 달걀 광주리를 이고 왔고, 술집 여자 다섯 명이 조선 인삼을 가져왔다. 그와 친했던 골동품 가게 주인은 백자 항아리에 가득 물엿을 넣어와 다쿠미 베갯머리에 놓았다.

“우리의 친구여, 계속 우리와 함께해주오.”

야마나시(일본)=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1907년 일본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받음
1909년 현립 농림학교 졸업 후 영림서 근무
1914년 조선총독부 산림과 근무 및 경성감리교회 출석
1920년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운동
1927년 형 노리타가와 광주 도자 분원 가마 흔적 조사
1929년 ‘조선의 밥상’ 간행
1931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