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농부를 꿈꾸지는 않았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K는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과학자라는 미래를 품고 있었다. 땅에 기대어 사는 신산한 농부의 삶을 어릴 때부터 지켜봐서인지 연민은 있었을지 몰라도 애착은 없어 보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졸업을 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 지친 K와 몇 차례 전화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어느 때인가 불쑥 자취방에 찾아와 말없이 자고 가기도 했었다.
세월과 함께 부침을 겪으면서도 20년간 서울살이의 끈을 놓지 않았던 K는 2010년 고향 전북 김제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참을 연락이 닿지 않더니, 불쑥 딸기 농사를 짓는다며 제법 재미있다는 전화가 왔었다. 딸기를 주문해 택배로 받으면서 ‘농사꾼 K’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군대 가기 전까지 2년 반, 제대하고 1년을 붙어 다닌 그에게서 농사꾼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번의 카톡과 전화를 주고받았고 늦장가를 축하하러 김제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늘 K에게선 진한 흙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게 의아하기도 했다.
아뿔싸, 착각이었다. ‘청년농부’로 불리는 그는 꽤 현명하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는 스마트팜을 운영하는 차세대 농업인이 됐다. 800평가량 온실의 안팎에는 온도와 습도, 일조량을 감지하는 센서, 통합 제어기는 물론 CCTV가 갖춰져 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원격으로 딸기가 잘 자라도록 환경을 맞춰주는 일이 가능하다. 스마트팜 시설을 도입하면서 일은 한결 수월해지고 생산량, 소득이 늘었다고 한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첨단장비로 무장한 농장에 출근하는 K의 모습은 선입견을 여지없이 깬다.
농사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스마트팜, LED 조명 등을 활용하는 ‘식물공장’은 우리 농림축산업이 가야 할 길의 초입에 불과하다.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한 종자 개량, 새로운 농림축산물 개발·생산은 ‘혁명’의 서막을 알린다. 혁명은 유전자공학이나 분자생물학 같은 생명과학기술(바이오기술, BT)을 앞세운 바이오산업의 옷을 입고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바이오산업은 의약품 개발과 질병 치료에 초점을 맞춘 레드(red) 바이오, 종자 개량이나 기능성 제품 생산 등에 적용되는 그린(green) 바이오, 에너지·화학 분야에 융합되는 화이트(white) 바이오로 크게 나뉜다.
그린 바이오 중에 최근 주목을 받는 건 대체 육류다. 세계 육류산업의 매출은 연간 1조 달러로 추산된다. 컨설팅업체 AT커니는 2040년에 대체 육류가 육류시장의 60%를 점령할 것으로 본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몸살을 앓는 중국에서는 홍콩의 ‘라이트 트리트(Right Treat)’라는 회사가 만드는 식물성 돼지고기 ‘옴니포크(omnipork)’가 관심을 끌고 있다. 옴니포크는 완두콩, 표고버섯, 쌀 등에서 추출한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다.
우리도 정부 차원에서 바이오산업을 비메모리 반도체, 미래형 자동차와 함께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선정하고 올해에만 바이오 분야 2조9300억원을 투자한다. 다만 초점은 레드 바이오에 맞춰져 있다. 여전히 농림축산업은 산업 축에도 못 낀다는 느낌을 준다.
1차산업이라는 편견과 달리 농림축산업의 파괴력은 세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세계 식품시장 규모는 6조6690억 달러에 이른다. 자동차시장 규모는 식품시장의 22.2%, IT시장은 15.7%에 그친다. 범위를 좁혀 농축산물 수출시장만 봐도 1조4057억 달러(2017년 기준)에 달한다. 여기에서 미국은 9.8%, 네덜란드는 6.7%를 차지하는 1위와 2위 국가다. 한국의 수출 규모는 고작 66억 달러에 그친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많은 나라에서 농림축산업은 바이오산업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반면 우리 농촌과 산촌, 어촌은 여전히 보조금으로 버티며 늙어가고 있다. K 같은 청년농부가 더 많았으면, 농촌이 바이오산업의 전진기지가 됐으면 하는 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인가.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