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저 작가의 작품을 샀어요. 보여드릴까요.”
지난 11일(현지시간) 스위스 바젤 메세플라츠 홀1. 가로 10m가 넘는 거대한 집 모양 구조물의 여닫이문이 반쯤 열려 있다. 노마드 작가가 된 한국의 서도호(57) 작가가 자신의 고향집을 ‘파란 모기장 천’으로 구현한 작품 ‘한국, 서울 성북구 성북동 260-7번지’(2017년 작) 안으로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한 유럽인 노신사가 일행과 활달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작품 여기저기를 살폈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그는 “이렇게 투명한 재료를 쓴다는 게 중요해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아시아적 공기가 흘러요. 이런 대작(60만 달러·약 7억1000만원)은 못 샀지요, 허허. 그래도 갤러리 부스에서 이 작가의 소품은 샀다오”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이 구매한 작품의 사진을 스마트폰에서 찾아 보여줬다. 작가가 전속된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막 보고 나온 서도호의 ‘퓨즈 박스’(27만5000달러·3억2500만원)를 사간 컬렉터였다.
전 세계 슈퍼 컬렉터들의 집결지인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 ‘아트 바젤 2019’가 이날부터 이틀간의 VIP 오픈을 시작으로 16일까지 열렸다. 올해도 가고시안, 페이스, 데이비드 즈워너 등 세계 굴지의 232개 갤러리가 참가해 작가 4000여명의 작품을 선보였다.
갤러리들이 열띤 판매 경쟁을 벌이는 갤러리 부스와 함께 별도 장소에 마련된 언리미티드(Unlimited) 섹션은 아트 바젤의 ‘핵심 병기’로 보였다. 아트 바젤 글로벌 총괄 디렉터 마크 스피글러는 국민일보에 “49년 역사의 아트 바젤이 2000년부터 시작한 아주 도전적인 전시 방식”이라며 “갤러리 부스의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미술관급의 대형 설치, 조각, 미디어, 퍼포먼스 작품까지 선보인다”고 말했다.
갤러리 섹션에서 언리미티드 섹션으로 건너가면 갑자기 소인국에서 거인국으로 들어선 기분이 들 정도로 장대하다. 올해도 각 갤러리가 추천한 작가 가운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작고 작가인 이탈리아의 20세기 거장 루치오 폰타나부터 거장 반열에 오른 영국 조각가 앤서니 곰리, 미술계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40~50대 중진까지 75명(팀)의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한국에선 리만머핀 갤러리의 서도호, 국제갤러리의 강서경 작가가 뽑혔다.
하우저 앤 워스 전속의 미국 작가 래리 벨(80)은 ‘물 커튼’에 앞뒤로 영상이 비치는 작품을, 폴 매카시(74)는 성폭력을 비튼 가상현실 작품을 내놨다. 조각과 설치 기반의 노장들도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트페어가 아닌 아방가르드의 현장인 비엔날레를 연상시킬 정도다.
리만머핀 갤러리의 한국 지점 손엠마 대표는 “미술관급 규모라 미술관들이 주로 작품을 산다. 개인 컬렉터들도 언리미티드 섹션에서 호기심을 느낀 뒤 갤러리 부스로 와서 해당 작가의 작은 작품을 사가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언리미티드 전시 작품 명세표에 소속 갤러리를 ‘미끼’처럼 명시하는 것이다.
갤러리 섹션에는 흥정의 열기가 넘쳤다. 갤러리스트와 컬렉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구매를 논의하는 모습이 흔하게 포착됐다. 가고시안, 페이스, 타데우스 로팍 등 수백억원대 작품을 내놓은 갤러리에도 활기가 흘렀다.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사이 톰블리의 1973년 작 드로잉 연작 24점을 2900만 달러(343억원)에 들고 나왔다. 가고시안은 ‘미술계 악동’ 제프 쿤스의 진분홍 하트 리본을 1400만 달러(165억원), 앤디 워홀의 대형 회화를 900만 달러(106억원)에 내놨다.
전시실 부스마다 지난해보다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박서보의 1970년 묘법과 영국 여성 작가 트레이시 에민의 페미니즘 회화 등이 걸린 영국의 화이트 큐브 갤러리 관계자는 “엄청나게 잘 팔리고 있다. 아주 행복하다”며 웃었다. 첫날 부스에 걸렸던 200만 달러(23억원)짜리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등 판매 성적이 좋다는 페이스 갤러리의 이영주 한국 지점 대표는 “아트 바젤 홍콩이 아시아인 취향에 맞춰 대중적이면서 화려한 작품을 들고 나온다면, 스위스 아트 바젤은 서구 미술 전통이 깊은 유럽 컬렉터에 맞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바젤=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