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고생이 할매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입력 2019-06-15 04:01
신간 ‘할매의 탄생’에서 자기 생애를 구술한 대구 달성의 산골 마을 우록리 할머니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혜순 이태경 곽판이 조순이 유옥란 김효실 할머니. 글항아리 제공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그라니 시집 와가 아 일찍 논 여자들은 시오마이 아 받아주고 젖도 먹여 키우고 그케 마이 했다”라는 문장을 읽노라면 집집마다 아이가 얼마나 많이 태어났는지 느낌이 팍 온다.

대구 달성의 산골 마을인 우록리 할머니 6명의 생애 구술이 담긴 신간 ‘할매의 탄생’에 나오는 얘기다. 저자는 도시 빈곤 노인의 생애를 구술한 ‘할배의 탄생’으로 잘 알려진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62)이다. 구술생애사란 구술을 통해 개인의 생애를 기록하는 일을 가리킨다. 지배층 중심의 기존 역사가 배제한 민중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사료 가치도 크다.


할머니들은 1928년부터 55년 사이에 태어났다. 작가는 2017년 여러 차례 이 마을로 내려가 할머니들의 생애를 녹취했고, 구술을 최대한 살려 정리했다. 할머니들의 생애 경험과 해석, 보람과 상처가 생생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온다. 우리 사회가 압축적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농촌의 이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고 관계를 맺었는지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조순이(82·대촌댁) 할머니다. 소제목이기도 한 “내 살은 거를 우예 다 말로 합니꺼”란 말이 조 할머니의 생애를 단적으로 짐작케 한다. 열한 살이 되던 해, 체증에 걸린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갔다. 네 살, 다섯 살 동생을 키우며 살림을 도맡아 했다. 우록리로 시집을 와보니 시어머니와 시형제 일곱이 밥상 앞에 둘러앉았더란다.

없는 살림에 손만 큰 시어머니와 다투다 첫아이를 낳고 친정으로 ‘내뺐다가’ 젖이 불어서 우록리로 돌아왔다. “아 놓고 일주일 만에 모 숭구러 가는 거럴 안 말긴 거도 글코, 마 빚내서 남 퍼주는 거도 글치만도 젤 서러분 기 한동네 바로 저 있는 시동상네 사논 집으로 나가뿌신 거, 거거가 내는 제일로 그캅디다. ‘몬된 맏미누리가 시오마이 쪼까냈다’ 방 붙이는 거라예.”

하지만 지금은 자손들이 잘 되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생전에 많이 베푼 덕이라고 여긴다. “어른이 빌게(별게) 아이고, 죽고 나서 자식들한테 갈챠줄 기 있는 기, 그기 어른입디다. 우리 시오마이는 어른이지예. 뒤늦게라도 내가 배우는 게 있으니까네.” 그는 시어머니를 이렇게 말할 만큼 이미 너그러운 어른이다. 여전히 상처받는 말은 있다. “오매는 했는 기 뭐 있노?”라는 장남의 원망이다.

“그래 없어가지고 대학 몬 시긴 걸로 하는 말인지, 공부가 아숩던 모양이라. 그래도 ‘했는 기 뭐 있노’ 이카이 으찌나 섧은지….” 할머니는 아들의 버스비를 마련하기 위해 밭을 맸다. “밭매만 그때 돈으로 삼천원인가 그런데, 차비 줄라꼬 혼자 넘의 밭 기어다니매 밭매고, 허리 아파가 밤에 잘 자도 몬하고.” 아들이 어머니의 이 고생을 알 리 없다. 부모의 내리사랑인 모양이다.

경북 청도에서 이 마을로 시집온 이태경(84·각골댁) 할머니는 아직도 홍역으로 일찍 잃은 여섯 살 난 딸 얘기를 하면 눈시울을 붉힌다. 계모 밑에서 자란 유옥란(77·안동댁) 할머니는 첫 남편과 사별 후 우록리 남자와 재혼을 했다. 그에게 딸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손녀를 서울로 보내버렸다. “지도 새오매 밑에, 계모 밑에 자랐으믄서 전처 아를 쪼까냈다 카마 별 억지가 많더라. …이제는 넘들 말질은 마 아무치도 않다. 갸가 젤 불쌍코, 어려서 오매 죽어뿐 내가 불쌍타. 우야겠노….” 우록리 태생의 김효실(65) 할머니는 빨치산에게 총을 맞아 불구가 된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 때문에 우록을 떠나지 못했다. 우록 마을의 ‘큰형님’ 곽판이(91·창녕댁) 할머니는 남편의 제사는 챙기면서도 “나 죽으면 화장해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며 죽음에 대범하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임혜순(77·수점댁) 할머니는 “살아온 게 다 한심하고 속에서 불떡증이 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올해도 “콩 쪼매 숭구고, 들깨 쪼매 숭구고, 상추, 배치도 좀 숭구”며 살아간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노동과 통증, 가부장의 균열, 다양한 낙인 등 우리 사회를 새겨볼 만한 단상을 정리한다. 최 작가는 14일 국민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보수적인 농촌에서 산 여성 노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도시 빈곤 노인과 달리 땅이라는 터전이 있는 이들이 가족과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유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주인공들이 얼마나 고생했고 가난했는지가 아니라 그 가난과 고생으로 그들 안에 어떤 힘의 깡치가 생겼는지, 그것이 그들을 얼마나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 힘으로 어떻게 자기 삶과 세상을 버텨왔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들의 생애를 세세히 묻는 이유다.” 이 말처럼 책은 가난과 고생이 할머니들의 생을 얼마나 애처롭게 했는지 주목하기보다는 할머니들을 얼마나 강인하게 만들었는지를 실감 나게 전한다. 어쨌든 할머니들은 이 생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