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5일 북한의 취약계층을 돕는 국제기구 사업에 남북협력기금 800만 달러(약 94억원)를 무상 지원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이르면 다음 주 정부가 국제기구 계좌로 돈을 송금하면 국제기구는 자체 구매 시스템을 통해 북한에 필요한 물자를 보내게 된다. 대북 인도적 지원의 물꼬를 튼 정부는 북한에 직접 식량을 지원하는 문제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남북, 북·미 관계가 풀리길 기대하고 있지만 북한이 호응할지는 불분명하다.
통일부는 지난달 29일부터 이날까지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교추협)를 서면 개최해 세계식량기구(WFP)의 북한 영양지원 사업에 450만 달러(약 53억원), 유니세프의 모자보건·영양 사업에 350만 달러(약 41억원)를 지원하는 안건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지난달 17일 남북협력기금 공여 결정을 한 뒤 19일 만에 집행 결정이 이뤄졌다. 통일부 관계자는 “국제기구로부터 계좌를 받아 입금하기까지 업무일 기준 3~4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정부는 이미 2017년 9월 교추협에서 대북 800만 달러 지원안을 의결했지만 집행하지 못하고 기한을 넘겼다. 미국이 ‘비핵화 전 제재 완화는 없다’는 원칙을 유지하면서 정부도 보조를 맞춰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달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WFP가 북한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한·미 정상이 인도적 지원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외교부는 한·미 워킹그룹 실무협의차 방한한 알렉스 웡 미 국무부 부차관보와 4~5일 협의를 갖고 대북 인도적 지원 등 제반 사항을 논의했다. 5일에는 한·미·일 3국의 북핵 실무진 간 협의도 진행됐다. 웡 차관보는 지난달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함께 방한했을 때도 북한 경제 전문가들을 따로 만나 의견을 청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인도적 지원과 정치적 상황은 별개라고 선을 긋고 있지만 800만 달러 지원 카드는 남북, 북·미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유화 제스처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간 인도적 지원을 ‘부차적인 문제’ ‘생색내기’라고 깎아내리면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행하라”고 주장해 왔다. 남북 간 합의 이행을 촉구하면서 동시에 남측이 더 적극적으로 미국의 입장 변화를 설득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이런 입장을 밝힌 만큼 인도적 지원 결정에 바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은 6·12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지난 4일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도 “우리의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미국이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경고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4월 시정연설의 연장선에 있다. 김 위원장의 최근 공개 행보는 군 관련 시설에 집중돼 있는데 이 역시 저강도 대미 압박으로 분석된다.
다만 대화 재개 신호로 해석될 만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숙청설 등이 나돌았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김여정 당 제1부부장 등 핵심 인사들이 속속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북·미 정상이 직접 서명한 6·12 공동성명을 귀중히 여기고 있다”고 밝힌 점 등이 그렇다.
청와대는 신중 모드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접촉이 있느냐는 질문에 “실제로 무엇이 있다고 지금 확인하기는 좀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열매가 완전히 무르익기 전에 따면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며 “우리 쪽에서 나가는 관측과 추정이 상대국에는 명확한 입장으로 읽힐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발 한발이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권지혜 최승욱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