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감독·겁없는 아이들, 새벽을 깨웠다

입력 2019-06-06 04:01

정정용(50·사진) 감독이 이끄는 20세 이하(U-20) 남자 축구대표팀이 ‘어게인(AGAIN) 1983’을 위한 마지막 고비만을 남겨뒀다. 선수로 태극마크 한 번 달지 못한 무명이었던 정 감독은 상황에 따른 맞춤형 전술을 바탕으로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은 후 16년 만에 한·일전 패배도 설욕했다. 정 감독과 연령별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춰온 ‘정정용 키즈’ 역시 경기를 거듭할수록 원팀으로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대표팀은 5일(한국시간) 폴란드 루블린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16강에서 오세훈(20·아산)의 결승골로 일본에 1대 0 승리를 거뒀다. 6년 만에 8강에 진출한 대표팀은 9일 세네갈을 상대로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U-20 월드컵 전신) 이후 36년 만에 4강 신화에 도전한다.

대표팀이 8강까지 순항을 이어온 밑바탕에는 정 감독의 변화무쌍한 전술 운용이 깔려 있다. 단적으로 일본전에서 정 감독은 전반에 사실상 5명의 수비를 두는 3-5-2 포메이션으로 임했으나 후반에는 4-4-2 포메이션으로 바꿔 공세의 고삐를 높였다. 전반 점유율 28%대 72%로 잔뜩 웅크렸던 대표팀은 후반에 발이 빠른 엄원상(20·광주), 전세진(20·수원)을 넣어 상대 빈틈을 파고들었다. 김대길 KBSN 해설위원은 “정 감독이 대처를 잘했다”며 “후반에 4백으로 바꾸고 엄원상, 전세진으로 공격 활로를 여는 전술 변화가 적중했다”고 평가했다.

4강 신화에 재도전하는 정 감독은 그간 U-20 대표팀을 맡았던 홍명보, 신태용, 이광종 전 감독 등과 비교하면 무명에 가깝다. 선수 시절 국가대표는커녕 프로 무대도 밟지 못했다. 92년부터 97년까지 실업축구 이랜드 푸마에서 선수생활을 한 것이 전부다. 지도자로 변신한 뒤에는 유소년 전문 지도자로 경력을 쌓았다. 2009년 14세 이하 선수를 이끌고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전승 우승한 데 이어 2016년에는 U-20 대표팀 감독 대행으로 수원 컨티넨탈컵 우승을 이끌었다. 지난해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대회에선 현 대표팀 선수를 이끌고 준우승을 차지해 이번 대회 티켓을 확보했다.

대회 전부터 시선을 집중시켰던 이강인(18·발렌시아) 외에 그동안 각광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속속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정 감독의 구상을 경기장에서 실행하며 대표팀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이 중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와의 조별리그 선제골에 이어 일본전 결승골을 넣은 오세훈은 팀에서 유일하게 멀티 골을 기록 중이다. 프로축구 2부리그(K2리그) 소속인 그는 193㎝의 큰 키를 바탕으로 한 제공권으로 직접 슈팅을 때리거나 동료 선수에게 연결하며 상대 수비를 흔들고 있다. ‘포스트 김신욱’으로 불리며 대표팀의 강력한 공격 옵션으로 떠올랐다.

대학생 듀오 최준(20·연세대)과 정호진(20·고려대)도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비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어릴 적 윙으로 뛰었던 최준은 윙백에서도 공격적인 재능을 뽐낸다. 오세훈의 결승골을 도운 날카로운 크로스도 그의 작품이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정호진은 투지 넘치는 압박으로 중원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주로 ‘조커’로 투입되는 엄원상은 빠른 발로 상대 진영을 헤집는다. 정 감독은 일본전 후 “한 경기 한 경기 결승전이라 생각하고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밝혔다.

김현길 방극렬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