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소련의 모진 위협 어떻게 극복했나

입력 2019-06-01 04:01
핀란드는 20세기 중반 소련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당시 전쟁에서 하얀 위장복을 입고 전쟁에 임했던 핀란드 군인들(왼쪽 사진)과 스웨덴으로 피신한 핀란드 아이들. 김영사 제공

따분한 작품일 거라고 넘겨짚기 쉽다. 핵심 내용만 몇 개 간추려보자. “국가가 위기를 극복하려면 과거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왜 위기에 처했는지 ‘정직한 자기평가’에 나서야 한다” “위기 극복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동맹국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가 담겼다고 그렇고 그런 교양서겠구나 예단해선 안 된다. 아마도 이 책은 올해 내내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 것이다. 저자의 명성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대변동’은 ‘총, 균, 쇠’ ‘제3의 침팬지’ 같은 작품으로 세상을 들썩이게 만든 재레드 다이아몬드(82)가 ‘어제까지의 세계’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소문난 독서가이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올여름 휴가지에서 읽을 ‘추천 도서’로 대변동을 첫손에 꼽았다. 뒤표지엔 이렇게 적혀 있다. 대변동은 저자가 내놓은 “60년 문명탐사의 결정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얼마간 진부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작품을 내놓은 걸까. 책의 말미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비판주의자는 (책에 담긴) 제안에 ‘당연한 말을 늘어놓는 거잖아’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그 ‘당연한’ 조건이 과거에도 시시때때로 무시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걸핏하면 무시된다는 게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이 필요한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살피는 데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 학자다. 그리고 이런 솜씨는 신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위기를 마주한 국가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으며, 때론 위기가 번영의 끌차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비중 있게 다루는 국가는 모두 7개국(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이다. 어떤 나라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 탓에, 어떤 국가는 내부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혹은 점진적으로 누적된 크고 작은 위기들로 존폐의 기로에 섰었다. 저자는 이들 국가를 통해 국가 위기 해결에 영향을 끼치는 12가지 요인(표 참조)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핀란드의 굴곡진 현대사를 다룬 첫 번째 챕터다. 20세기 중반 핀란드는 소련의 위협에 시달렸다. 소련과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국민이 10만명에 달했다(당시 핀란드 총인구의 2.5%에 달하는 숫자로 미국으로 따지자면 900만명이 전사한 것과 같다). 핀란드는 살아남기 위해 많은 걸 내려놓았다. 배상금을 착실하게 지급했고, 소련과 전쟁을 벌인 자국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보냈으며, “표현의 자유를 희생”하면서 소련을 향한 비방도 멈추었다. 저자는 핀란드를 “타고난 유연성을 보여준 국가”라고 치켜세운다.

“(소련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핀란드는 미국과 스웨덴, 독일, 영국, 프랑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야말로 쓰라린 기억이었다. 이들은 역사에서 생존과 독립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고, 소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핀란드를 신뢰할 때 핀란드도 안전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한국 독자에게는 일본이 한국 중국과 맺고 있는 껄끄러운 관계를 분석한 대목이 인상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저자는 “일본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보다 자국이 다른 국가에 가한 잔혹 행위의 피해를 묘사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한국인과 중국인도 일본의 진정성을 인정하며 받아들일 것”이라고 썼다. 미국에서 “정치적 타협의 악화”가 심해지고 있다면서 언젠가 미국이 군부 독재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본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 한국을 향한 애정을 거듭 드러낸다. 실제로 그는 ‘총, 균, 쇠’에서도 한글이 얼마나 대단한 문자인지 찬양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트집 잡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신작에서 위기 극복의 사례로 한국을 비중 있게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 저자가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거나 한국의 미래를 내다본 글을 쓰는 날이 올까. 여든을 넘긴 고령이니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아직도 미국 UCL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탈리아 회화 레슨을 받는다고 한다. 그동안 자주 한국을 찾았으며, 틈틈이 한국 장식품을 구입해 앞으로 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아내에게 선물하려고 쟁여놓은 다정한 사람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그가 한국 독자에게 띄운 살뜰한 편지가 실려 있다.

“미국과 터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내 책의 판매량이 가장 많습니다. …나는 한글, 한국인 친구들과 학생들을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입니다. 물론 내 아내 마리도 내가 향후 6년 동안의 기념일을 위해 감추어둔 한국 선물을 앞으로도 좋아할 것입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