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20일 우리 정부에 중재위원회 개최를 요청했다. 일본은 지난 1월 외교적 협의 요청에 우리 측의 반응이 없자 다음 수순인 중재위 개최 요청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 정부는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에 관한 양국의 견해차가 커서 중재위를 통한 문제 해결은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일본은 우리 정부가 중재위 개최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중재위 개최를 요구했다.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협정 3조2항은 ‘외교상 경로’로 해결할 수 없는 분쟁 사안에 대해서는 제3국 위원을 포함, 총 3인의 중재위를 구성해 결정하도록 규정했다. 중재 요청이 상대방 국가에 접수된 뒤 30일 이내에 한국과 일본이 각 1명의 중재위원을 선임한 후, 다시 30일 내에 제3국 중재위원 1명을 합의해 정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를 강제하는 규정은 없어 한쪽이 응하지 않으면 중재위는 구성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 정부가 중재위 구성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5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이 문제에 관해 “사법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 행정부가 나서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삼권분립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기조 하에 지난 1월 일본의 외교적 협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한·일 청구권협정상 외교적 협의에 이어 중재위 구성까지 제시한 일본이 ICJ로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가져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직후부터 ICJ 단독 제소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우리 측이 응하지 않으면 재판은 열리지 않는다.
일본은 오는 22~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 이사회 때 개최를 조율 중인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재위 문제를 거론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선 양국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의 중재위 개최 요청은 예고됐던 수순”이라며 “우리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방안을 확정한 후 일본 측을 만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어려운 문제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정부가 신중히 검토한다고 했지만 일본 측이 요청한 중재위 개최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일본은 중재위를 요청해 우리 정부의 결단을 압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우리 정부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빨리 결단을 내려서 한·일 관계를 적극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