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동남아시아 순방을 마친 직후 청와대가 전격적으로 북·미 사이 중재안을 꺼내들었다. 북·미 간 협상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달했다고 판단하고 이 시점에서 새롭게 판을 짜보자는 제안이다. 규모를 중시하는 ‘스몰딜’ ‘빅딜’이라는 용어 대신 핵심 사안을 선별해 단계적 합의를 하자는 ‘굿이너프(good enough)딜’(충분한 수준의 합의)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어차피 미국에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고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도 향후 구체적인 협상 과정에서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7일 예고 없이 춘추관을 찾아 작심하고 발언을 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실보다 득이 많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빈손 귀국”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모 아니면 도) 전략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등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시한 게 굿이너프딜을 통한 상호신뢰 확보 방안이다. 북·미 양쪽이 만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별 합의를 먼저 이루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변 핵시설이나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폐쇄가 중대한 계기라는 데 북·미가 합의하면 부분적 대북 제재 완화 논의를 시작하는 식이다. 북한의 기계적인 단계별 보상 요구도, 미국의 빅딜 요구도 아닌 새로운 가치 판단을 남·북·미 3자가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문제는 이 같은 과정에서 북·미가 어떤 시설이 핵심인지, 그렇다면 어떤 보상을 줄 건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단계별로 성공 여부를 지표화하는 것에 대한 남·북·미 간 개념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 관계자는 “어떤 상태가 돼야만 북한의 핵활동이 중단된 것이냐, 어떤 시설이 어떻게 해체돼야만 북한이 핵능력을 보유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를 고민해볼 때가 됐다”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노력은 비핵화 전 과정에 대해서 합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어마어마한 도전”이라며 “이런 것이야말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 정상 간 결단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중재안을 내놓은 것은 어쨌든 북·미 모두 판을 깨기는 어려운 상황까지 발을 디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양측 모두 2017년 이전의 갈등과 대결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절대 원하지 않는다”며 “저희가 볼 때는 북·미 모두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굉장히 앞서 나갔다. 사실상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세계 모든 나라가 문 대통령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며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 것임을 강조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