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꽃을 가지고 생을 그렸던 사람인데, 이제는 생 속으로 들어간 거야. 송홧가루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지요.”
표정은 밝았고, 목소리엔 열정이 묻어났다. 입을 열 때마다 특유의 수사와 탁견이 흘러나왔다. 연초 암 투병 사실이 언론에 공개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이어령(87) 전 문화부 장관. 그가 지난 14일 특별한 나들이를 했다.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린 김병종(66) 작가의 개인전 ‘송화분분’전 개막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김 작가의 7년 만의 개인전이며, 지난해 서울대를 정년퇴직하고 전업 작가가 된 이래 처음 가진 전시이기도 하다. 작가는 춘삼월 봄날이면 노란 송홧가루 흩날리던 유년의 기억을 화폭에 담았다. 목숨처럼 선명했던 붉은색 꽃 하나로 화폭을 가득 채웠던 ‘생명의 노래’ 연작에 이은 변신이다.
전시장은 노란색이 점령했다. 벌거벗은 소년이 엎드린 땅에도 송홧가루가 분분하고, 빨간 생명의 꽃 주변으로도 노란 가루가 날린다. 화조화와 산수화의 결합 같은 작품 30여점이 나왔다.
이 전 장관은 그 노란색을 두고 “황제가 입는 곤룡포 같은 권위의 황색, 어린이에게 입히는 환한 노랑이 아니다. 오히려 눈에 안 띄는 노란색이다. 뿌옇고 몽환적이어서 무의식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색”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수필가, 학자였고 대표적 지성으로 통하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미술비평은 상투적이지 않아 신선했다.
이 전 장관에게 김 작가는 “생명 전(展)을 같이 했던 사람”이다. 2014년 초 전북도립미술관에서 김 작가의 회고전 ‘김병종-30년 생명을 그리다’가 열렸다. 미술관 측에서 생명을 주제로 이 전 장관의 특강을 요청했는데 강당이 미어터지도록 전국에서 수강생이 몰렸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생명 그리고 동행’전을 열었다. 이 전 장관은 생명을 주제로 시 10여편을, 김 작가는 ‘생명의 노래’ 연작 회화 20여점을 내놨다.
김 작가는 “화가의 꿈을 선생님도 모르게 내게 뿌리셨다”고 언급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이 전 장관의 수필집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를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봤는데, 거기 실린 삽화를 보고 “‘저런 유명한 분 책에 실린 삽화가 저 정도라면 화가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이 전 장관은 “예전에는 문학하는 사람과 미술하는 사람이 굉장히 가까웠다. 이중섭이 구상과 얼마나 가까웠나. 지금은 그게 없어”라며 장르 간 칸막이 문화를 안타까워했다.
개막식에서 이 전 장관은 이런 축사를 했다. “생명의 노래는 생명이 풍성할 때는 나오지 않는다. 생명이 고갈돼 갈 때 생명의 노래가 나온다. 그래서 생명의 최소 단위에 주목하는 김 화백의 그림이 놀랍다.”
췌장암 통보를 받고도 항암과 방사선 등 일체의 의학적 치료를 거부한 채 죽음을 직시하며 매일매일 농밀하게 살아가는 이 전 장관의 심정을 말하는 듯했다.
글·사진=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