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파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교육 당국이 얼마나 한유총 입장에서 움직였는지 드러내는 수치이기도 하다. 국·공립유치원은 2017년에 4747개가 있었다. 학급 수는 1만395개였고 원아 17만2521명을 수용했다. 교육 당국은 국공립을 늘려달라는 학부모 요구를 반영해 국공립유치원 54개, 학급 수 501개를 확충한다. 그러나 국공립유치원에 다니는 원아는 17만2553명으로 32명 늘었을 뿐이다. 교육 당국이 사립유치원 반발을 의식해 유아교육 수요가 높은 대도시와 신도시를 외면하고 농산어촌을 중심으로 국공립을 확충했기 때문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사립유치원이 자리 잡은 곳에는 국공립을 세우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국공립유치원들이 돌봄이나 차량 운행 서비스를 개선하지 못해온 이유도 사립유치원에 ‘알아서 긴’ 교육 당국 때문이란 지적이 많았다.
로비력과 동원력 그리고 벼랑 끝 전술
한유총은 1995년 설립 이후 줄곧 국공립 확충을 가로막았다. 한유총은 2000년대 초 공립 단설유치원 반대 투쟁을 주도하며 강력한 이익단체로 부상했다. 당시 정부가 공립 단설유치원 확대 정책을 발표하자 ‘사립 죽이기’란 논리로 제동을 걸었다. 2004년 유아교육 제도 정비 때는 영유아교육법으로 할지, 유아교육법으로 할지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한유총 주장대로 영아와 유아교육을 분리하는 ‘유아교육법’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이후 한유총은 막강한 로비력과 동원력 그리고 벼랑끝 전술을 적절히 섞어가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왔다. 지역의 ‘빅 마우스’였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눈치 보는 막강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교육감 직선제 이후에는 시·도교육청마저 사정권에 들어갔다.
한유총 로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신학용 뇌물 사건’이다. 2013년 9월 신학용 당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출판기념회 찬조금 명목으로 한유총으로부터 3060만원을 받아 대법원에서 뇌물로 인정됐다. 당시 신 전 의원은 사립유치원의 상속이나 양도를 쉽게 하는 유아교육법을 발의했다.
지난 대선 때도 한유총의 영향력이 회자됐다.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후보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2017년 4월 11일 사립유치원 교육자대회에 참석해 “단설유치원 설립을 자제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사립유치원 원장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국공립 확충을 희망하는 학부모들이 폭발했다. ‘교육 대통령’을 표방하면서 학부모 정서도 읽지 못했다는 비판에 안 후보의 지지율 상승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번번이 당한 교육 당국
2012년 누리과정(3~5세 무상교육) 도입으로 막대한 나랏돈이 지원되자 회계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가계부 수준인 유치원 회계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2014년 10월 교육부와 육아정책연구소가 주최한 ‘사립유치원 재무·회계 규칙 제정(안)’ 공청회에서는 한유총 회원들이 단상을 점거해 무산됐다. 2016년에는 유아교육 평등권을 내세워 정부 지원을 강화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가가 사립에 다니는 유아보다 국공립에 다니는 유아에 더 많이 지원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이런 주장을 하며 6월 30일 집단 휴원 엄포를 놨다. 정부가 한유총을 달래 휴업은 철회됐지만 학부모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사립유치원 회계 투명성을 높이는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을 반대하며 집단 휴원을 예고했다. 12월 20~22일 집단 휴원을 예고했지만 정부 설득으로 철회했다.
2017년 7월에는 정부가 마련한 ‘2차 유아교육발전 5개년 기본계획(2018~2022년)’ 세미나장에 난입했다. 국공립유치원 확대를 저지하고 정부 지원을 더 받으려는 이유였다. 모두 네 차례 세미나가 예정돼 있었는데 부산과 광주에서 열린 1, 2차 세미나는 진행됐지만 대전과 서울에서 열린 3, 4차는 단상 점거 등으로 무산됐다.
이어 9월에는 집단 휴원 엄포를 놨다. 유아학비 인상, 국공립 40% 확대 반대, 감사 계도기간 부여, 2차 유아교육발전 5개년 계획 전면 재검토 등을 요구했으며 9월 18일과 25~27일 집단 휴원을 예고했다. 한유총은 집단 휴원과 철회, 철회 번복 등을 오가며 학부모 속을 새카맣게 태웠다. 당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던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같은 당 안민석 의원이 중재에 나섰고 유아학비 인상 노력, 감사기준 완화 검토 등을 받아 내고 집단 휴원 계획을 접었다. 한유총은 “이번 휴원에 2만~3만명을 동원할 준비를 마쳤지만 교육부의 진정성을 믿고 철회한다”고 생색을 냈다.
한유총은 지난해 10월 5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최한 ‘사립유치원 비리근절 토론회’도 힘으로 저지했다. 국회의원회관에 회원 수백명을 난입시켜 난장판으로 만드는 대담함과 비리 사례가 공개되는 화면을 준비해온 우산을 펴 막는 기민함에 교육 당국도 혀를 내둘렀다.
마침표 찍힌 승리의 역사
이후 박 의원이 비리 유치원 실명을 공개하고 정부가 강공을 펴면서 한유총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새 학기 시작일인 4일 강행한 무기한 개학 연기 카드가 치명타였다. 강경 투쟁을 이끌었던 이덕선 이사장은 개학 연기 사태에 사과하고 지난 11일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26일 새 이사장이 선임될 때까지 내분이 일어 스스로 무너지거나 ‘식물’ 상태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서울시교육청이 법인 설립허가를 취소했고 법원에서 확정되면 24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교육부 서울교육청 공정거래위 국세청 등의 전방위 압박이 들어오는데 자유한국당은 분노한 학부모들 때문에 대놓고 한유총을 두둔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보인다.
한유총이 공중 분해되면 어떻게 될까. 강경파들이 별도 단체를 만들어 서울 외 다른 지역에서 설립 허가를 내거나, 한유총 온건파들이 한유총을 나와 설립한 한국사립유치원협의회(한사협) 조직 장악에 나설 것이란 시나리오가 나온다. 교육부의 회계 투명화 조치로 과거처럼 유치원에서 돈을 벌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업종 전환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부 개혁안을 수용하되 고의로 서비스 질을 낮춰 원생과 학부모를 몰아내는 ‘태업’을 지렛대 삼아 퇴로를 보장받으려 할 것이란 관측이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