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이쾌대의 DNA 흘러”… 장대한 ‘1987 분홍 역사화’ 압권

입력 2018-11-22 19:12 수정 2018-11-22 22:20
최민화 작가가 최근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작품 ‘신세계 전투-6·26 대공세’(1992년 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공립미술관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기는 처음이다. 본명은 최철환으로, ‘민화(民花)’는 민중의 꽃이 되겠다는 뜻으로 쓰는 예명이다. 대구미술관 제공
‘가투Ⅰ’(1996년 작). 대구미술관 제공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데…. 영화관이 깜깜해서, 어휴, 그나마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올 초 상영된 영화 ‘1987’은 ‘한열이’를 다시 불러냈다. 꽃미남 배우 강동원이 연기한 이 연세대 학생은 독재 타도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사망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이끈 기폭제가 됐다. 그 한열이를 소위 ‘의식화’시킨 연세대 만화 동아리를 만든 주인공이 최민화(64) 작가다.

최 작가가 지난 9월부터 대구 수성구 미술관로 대구미술관에서 2017년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 ‘최민화: 천 개의 우회’전을 갖고 있다. 이인성미술상은 대구가 낳은 천재 화가 이인성(1912∼1950)을 기려 99년부터 대구시가 수여하고 있다.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열정과 탐구정신이 이인성미술상의 지향점과 부합한다”는 것이 선정 이유다. 최근 전시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에서 작가를 만났다.

서울 출신으로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고교 미술 교사로 지내던 최 작가는 80년 광주사태를 접하며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자칭 ‘날렵한 모더니스트’로 예술지상주의를 꿈꾸던 그였다. 이 사건 이후 미술의 정치 참여를 모색하며 84년 운동권 선후배들과 ‘서울미술공동체’를 만들었다. 다른 민중미술 작가들이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판화에 주목했던 것과 달리 최 작가는 만화에 관심을 가졌다. 몇몇 대학에 만화 동아리를 만들어 가르쳤다. 연세대 학생 한열이도 그때 만났다. 신촌의 허름한 카페에서의 뒤풀이 때 자신이 쏟아내던 ‘구라(입담)’를 눈을 반짝이며 듣던 한열이에 대한 기억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역류했다.

이한열 열사 영결식 때 나왔던 가로 8m 대작 ‘그대 뜬 눈으로’는 최 작가가 장례위원회에 제안해 하루 만에 오열하며 그렸다고 한다.

회고전 성격의 전시에는 22세 때 그린 자화상부터 설화를 소재로 한 신작까지 나왔지만, 30대에 그렸던 ‘분홍 역사화’ 대작들이 압권이다. 80∼90년대 뜨거웠던 민주화 시위의 현장을 거대한 역사화로 재현한 것이다.

흔히 ‘분홍 회화’로 불리지만, 오히려 붉은색에 가깝다. 폭발하는 것 같은 붉은 화염의 색 때문인지 화면에는 분노와 함성, 열망이 지열처럼 번진다. ‘가투 Ⅰ’ ‘신세계 전투-6·26 대공세’ ‘파쇼에 누워’ ‘분홍 아스팔트’ 등 마치 민주화 시위 현장의 기록화 같은 작품들은 탄탄한 데생력과 종합적인 화면 구성 능력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크루아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통해 1830년 7월 혁명을 표상한 것과 유비된다. 월북 작가 이쾌대가 해방의 기쁨을 거대한 역사화로 그려낸 이후 한국 화단에서 이처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가로 4∼5m의 장대한 스케일로 시각화한 이는 그가 처음일 것이다.

이쾌대가 대중에게 알려진 건 88년 해금 조치가 이뤄진 이후 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다. 마침 6월 항쟁 역사화를 구상하던 그는 이쾌대 개인전 보도가 나오자 당장 달려갔다. 이쾌대를 오마주하듯 시위 장면 속 인물들의 눈을 이쾌대 식으로 그린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최 작가는 “내겐 이쾌대의 DNA가 흐른다”며 “옛날 것 중 좋은 걸 이어가는 게 전통인데, 한국만 쉽게 옛것을 버린다”며 안타까워했다. 근년엔 한국의 상고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그리는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연작에 몰두하고 있다. 전시는 12월 16일까지.

대구=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