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은 “시를 쓰는 일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몸으로 하는 것,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운 시어를 고르는 일만이 아니라 시인의 전 생활이 반영되는 일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문학이 그럴진대 신앙은 어떻겠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은 희랍어 ‘로고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로고스를 이성적 논리, 진리라고 표현합니다. 능력은 희랍어로 ‘디나미스’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 이 디나미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는 진리의 논변 또는 지식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고 확장해 나간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능력에 있다고 할 때 이 능력은 어떤 능력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능력을 말할 때는 보통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 방언, 예언의 은사 등 특별한 은사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능력이란 성령의 능력과 그 지배 아래 있는 삶을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온전한 성도의 삶을 감당치 못하는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고 권면하고자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 여러 분파로 분열돼 서로 자기가 옳고 정통이라며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부도덕한 방종의 생활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부유한 성도는 가난한 성도를 무시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우상숭배를 분명하게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성경에 있어 진리는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 드러나는 진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인 신앙의 독특한 성격은 진리를 인격에 결부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진리 자체의 탐구가 아니라 진리로 사는 것에 목표를 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진리를 찾으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진리와 지식의 원리를 추구하는 철학을 발전시켰다면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과 결부된 진리를 사는 신앙을 전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거부하고 고문과 박해를 당했으며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와 부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약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자신을 증인이라 생각하며 복음 선포를 증언이라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역사와 현실 속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건, 하나님 나라 사건을 증언했습니다.
신학자인 안병무 교수는 교회로서 설교하기 부담스러운 이런 증언들이 보존돼 성경에서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합니다. 사도들이 집도 재산도 없이 방랑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이후에도 무소유를 실천하며 여기저기 떠돌며 설교하던 방랑 설교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삶으로 말씀을 실천했기에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말씀이 보존됐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엄청난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웅장한 예배당과 많은 성도가 있고 유력하고 재능 있는 많은 사람이 그곳을 다닙니다. 재산까지 있으니 부족한 것이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처럼 교회가 무기력해 보인 적도 없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사회의 근심이 되고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증거하는 삶, 즉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맘몬의 포로가 돼 편리와 물질적 풍요를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며 성령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뜻을 좇아 사는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소박하고 영적인 삶, 이것이 오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증거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김유성 구세군율목교회 사관
[오늘의 설교] 하나님 나라의 능력
입력 2018-11-26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