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신념들의 갈등

입력 2018-11-22 00:00

가끔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해외 언론매체들을 살펴보곤 한다. 각 나라마다 갈등이 있다. 경제와 인종, 세대, 종교적 갈등 등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정치적 신념에 따른 갈등은 어느 나라에나 상존한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고 정치가 있는 곳에는 신념의 대립이 있는 법이다.

미국의 한 신문을 읽었다. 기사뿐 아니라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까지도 꼼꼼히 읽었다.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서로 대립과 반목을 조장하는 댓글들도 적지 않았지만 어떤 댓글들은 정치적 신념의 차이를 넘어 공동의 목표를 제시했다. 이런 댓글은 큰 호응을 얻었다.

심리학자들은 갈등을 대하는 방식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회피하는 유형과 상대방을 부정하고 내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유형,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순응하고 져주는 유형, 자기 것을 약간씩 양보하며 타협하는 유형,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양쪽 다 승리하는 유형 등이다.

보통 정치 영역에서의 갈등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다가 안 되면 타협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기사의 댓글들은 정치 영역에서도 소위 말하는 ‘윈-윈 전략’을 갖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정치·종교·세계관적 신념 등의 차이와 갈등이 발생할 때 그 신념에 당파적으로 헌신할 수도 있고 인격적으로 헌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철학자 도널드 데이비슨이 말한 것처럼 신념을 갖고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다.

문제는 신념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당파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매우 거친 특성이 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상대방의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언어에는 대화보다 대립, 공감보다 공격이 도드라진다.

반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인격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상대방의 공통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방을 이기거나 극복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나은 것과 참된 것을 추구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공통점을 더 확보하고자 애쓴다. 공동의 일치 영역이 확보될수록 대화는 더욱 진전되며 가시적 결과를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말한 것처럼 자유주의 사회는 종교와 도덕, 형이상학적 불일치를 용인하고 정보와 시민들의 주장을 통제하지 않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원주의적 특성이 야만적이고 무분별하게 활성화된 사회는 기초적인 문화와 인간관계의 활력이 도리어 마비되며 사람들은 소외와 폭력에 시달릴 수 있다.

철학자들은 더 이상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깊은 의견의 차이’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선 화해할 수 있는 의견 차이도 ‘깊은 의견의 차이’로 몰아가는 경향이 짙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용인하지 못한다.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주의 깊게 읽고 수납한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의심하거나 거절하고 트집을 잡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은 갈수록 커지고 집단적 피로감은 높아진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단순한 해법이 있지는 않겠지만 우선 자신의 신념을 인격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독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마태복음 7장 12절의 황금률을 ‘기록된 양심’이라 불렀다. 글을 올리기 전, 혹은 말을 하기 전에 우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자신과 상대방의 신념이 동시에 지향하는 공동의 목표를 높은 차원에서 조망해 보는 시도도 중요하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이 철학자이거나 시인”이라며 지식과 기예보다 앞서는 사람됨의 측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더 높은 목표를 향한 성찰의 과정은 내가 놓치고 있던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다. 신념의 갈등을 화합의 통로로 삼는 건 어떨까.

우병훈(고신대 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