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1월 20일] 가시도 자존심이다

입력 2018-11-20 00:05

찬송 :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456장(통 509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사기 9장 15절


말씀 :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왜 가시나무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기드온이 죽은 후 사람들이 그의 집을 후대하지 않았다는 말씀(삿 8:35)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가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묵상했습니다.

기드온은 죽었고 남겨진 그의 아들은 70명이나 되었습니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관심 밖인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처럼 관심과 칭찬 그리고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았습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할 때마다 아비멜렉은 조금씩 뾰족해졌을 것입니다. 그는 점점 뾰족해졌고 사람들은 점점 그를 더 멀리 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가시는 더욱 많아지고 더욱 뾰족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비멜렉은 가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가시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자극에 따라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자극을 받으면 좋은 반응이 나오고, 나쁜 자극을 받으면 나쁜 반응이 나옵니다. 뾰족해서 무서운 사람들을 보십시오. 오랫동안 나쁜 자극에 노출된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나쁜 사람이라 뾰족한 것이 아니라 나쁜 자극을 많이 받다 보니 뾰족해졌을 경우가 많습니다.

뾰족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뭐라고 말합니까. “좀 찌르지 말라고!”라고 말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누군가 마음의 쿠션을 가지고 계속 찔려주면 그 가시가 조금씩 무뎌지더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새 가시가 부드러워지기까지 합니다.

찌르면 받아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섣불리 가시를 뽑아버리겠다고 해보십시오. 오히려 더 세게 찌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뾰족한 사람에게 가시는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가시는 억지로 뽑지 말고 계속 받아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툴툴 성질을 부립니다. 이 모습을 보는 부모는 같이 화를 냅니다. “왜 집에서 성질이야!”라고 자녀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가 안전하게 성질부릴 곳이 집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질은 주체할 수 없는데 어디에서 풀라는 말입니까.

부모 앞에서 성질부리는 자녀를 보면서 ‘우리 아이가 저렇게 집에서 화를 내는 것은 버릇이 없어서가 아니야. 밖에서 화나는 일이 있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가 집에 와서 푸는 거야. 녀석, 참느라 많이 힘들었겠다’라고 품어줄 수는 없을까요. 그래야 뾰족하게 자라지 않습니다.

집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다면 점점 더 뾰족해져서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무서운 칼날 같은 가시가 돋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야말로 뾰족한 가시를 받아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가족이야말로 찔려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우리의 가정이 세상에서 찔린 상처로 돋아난 가시를 잘 받아주는 주님의 품 같은 집에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오연택 목사(대구 제일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