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북한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입력 2018-11-13 00:03

보니엠이 부른 ‘바벨론강’이란 팝송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이 노래 뜻도 모른 채 흥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전 보니엠이 한국을 순회하며 거둔 수익금을 북한을 위해 기부했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서야 바벨론강의 번역된 가사를 찾아봤습니다.

“바벨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가슴에서의 묵상을 여기 오늘밤 주님 받아주세요.”

시편 137편을 가사로 삼아 작곡한 것입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민족의 애환이 잘 묘사돼 있는 시입니다. 고향 예루살렘에 대한 간절함이 시 속에 담겨 있습니다.

1절은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합니다. 여기서의 ‘울다’는 아주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시온을 기억하며 앞에 ‘참으로’를 뜻하는 부사가 있습니다. 그만큼 시온을 그리는 마음이 사무쳐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겁니다.

본문에는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민족을 노리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들 앞에서 수금을 치고 노래를 불러보라 합니다. 우상 앞에 술을 붓고 우상 앞에 절하면서 여호와께 불렀던 거룩한 찬송을 수금으로 연주하라는 겁니다.

레위인은 어떻게 대처합니까.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4절) 아예 노래하기를 포기했고 수금 연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을 잊어버린다면 오른손이 말라 더 이상 수금을 연주하지 못할 것이다. 벙어리가 될 것이다.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예배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시온 예루살렘을 잊어버린다면 무가치한 물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재주도, 은사도 아무 소용없고 노래도, 말도 못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기자를 생각하며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 즉 북한을 떠올립니다. 한반도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시는 어느 시보다 더 북한을 향한 간절함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기억합니까.

현재 북한에 대한 국제관계, 정치적 접근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냉정함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내 민족과 형제자매, 무너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애정과 눈물이 먼저입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을 향한 간절함과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북한을 향한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이 헤아려지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길 원합니다. 주님이 울고 있는데 웃고 떠들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 땅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계신데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울 때 울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 이제 그만 우세요. 저들이 울어드리겠습니다”하며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온통 나와 가족을 위해 주님께 십자가를 다시 지우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라고 했습니다. 언제까지 주님만 십자가 지라고 하겠습니까. “주님 이제 십자가를 그만 지세요.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주님 이제 쉬세요. 주님이 져야 할 고난의 남은 분량을 제 육체에 채우겠습니다”라고 우린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 고백과 다짐 위에 북한이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춘 목사 (SFC 대표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