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된 이들이 처음 하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읊으며 의사라는 직업의 지향점과 마음가짐을 다지는 일이다. 하지만 최근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이 퇴색하는 모습이다.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치겠다는 첫 구절은커녕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고, 인종·종교·국적·정치색·사회적 지위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겠다는 서약이 현실에선 그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자꾸만 조건이 붙는다.
지난달 대한의사협회가 진행한 설문에서 ‘진료시간 및 진료 외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응급상황에 대한 대처요청이 왔을 때 응하겠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1631명 중 35.3%(576명)만이 ‘응하겠다’고 했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는 서약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1000여명은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워도 응급상황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 9월에도 비슷한 설문이 의사들 사이에 있었다. 의료배상공제조합이 조합원 97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219명 중 19.6%가 ‘의료분쟁에 대한 의료인의 책임강화로 중단한 의료행위가 있다’고 답했다. 5명 중 1명의 의사가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에 대한 의무만을 다하겠다고,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도 자신이 해야 한다고 판단한 의료행위가 다툼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길연 경희의대 대장항문분과장은 “(의사들이)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연쇄사망사건이나 의료과실 100%를 인정한 사례 등을 지켜보며 ‘나도 구속될 수 있겠구나’, ‘어쩔 수 없이 진료를 해야 할 때면 나도 저 사람처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의사들이 갖게 되는 솔직한 심정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이 같은 마음가짐과 행동의 변화가 비단 국내 의사들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방어 진료로 인해 한 해 6500억달러(한화 약 739조원)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추산한다. 전체 의료비의 약 30%가 방어 진료로 인한 것으로 파악되며, 80%의 의료진은 방어 진료를 하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미국만이 아니다. 이 교수는 영국 가디언지에 발표된 설문을 인용해 “의사들에 대한 법적처벌이 심해진다면 86%의 의사들은 방어 진료를 강화하겠다고 응답했고, 절반의 의사들은 고위험 환자들을 피하겠다고 답변했다”며 “고위험 환자의 치료가 제한되고, 사망률이 높은 환자에 대한 과도한 또는 미흡한 치료가 이뤄지며, 환자와 의사간 불신이 조장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의사도 사람인데 위험한 환자, 위험한 상황을 기피하려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며, “법적 제재의 강화, 즉 의사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환자의 안전을 개선시키지 못한다. 모든 개인과 시스템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 하고 이는 문화적 법적 개혁 없이는 이룰 수 없다”고 단언했다.
변호사들도 우려했다. 의사들이 ‘최선의 진료를 해야 할 의무’와 경제적 비용 효과적 진료를 요구하는 ‘요양급여기준 준수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합동법률사무소 전병남 변호사는 “사람을 쫓자니 돈이 울고, 돈을 쫓으니 사람이 없는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며 “요양급여기준 준수의무와 최선의 진료의무 간 모순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한다”고 말했다.
오준엽 쿠키뉴스 기자 oz@kukinews.com
“시간 장소 불문 응급요청때 응하겠다” 35%
입력 2018-11-11 17:55 수정 2018-11-11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