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예배 중 아이들을 축복하는 시간이 있다. 한 명 한 명의 머리와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하나님 OO이가 예수님을 닮아 키도 자라고, 지혜도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누가복음 2장 52절을 기도문으로 바꾼 것이다. 내 자녀를 위한 딱 하나의 성경 구절을 고르라면, 내 자녀를 위한 내 염원을 단 하나의 기도에 담는다면, 바로 저 구절이리라. 예수님처럼 전인적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예수님처럼 자라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주 가끔 내 목구멍에서 걸릴 때가 있다. 예수의 탄생은 잔혹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데, 누가복음이 그려내는 어린 시절의 예수는 정겹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 옛 전통의 회복을 꿈꾸는 노인의 소박하지만 따뜻한 환영과 노래, 축복의 기도가 곁들여 있다. 열두 살 되던 해의 명민한 예수는 이미 자신의 존재와 운명을 알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에 묘사된 예수의 유년기는 우울하다. 피로 얼룩져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베들레헴 주변의 무고한 아이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죽이려는 헤롯의 칼날을 피해 황급히, 그것도 한밤중에 이집트로 피해야 했다. 천사의 경고를 듣고 베들레헴에서 이집트 국경까지 가는 길만 128㎞를 내달렸다. 그곳에서 왔던 길보다 훨씬 멀고 거친 길을 따라 이집트 어느 마을에 정착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나 살았을까. 아기 예수는 이집트에 1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 시점을 역추적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곳에서의 생활을 말하지 않는다. 탈무드에선 예수가 그곳에서 마술을 배웠다고 한다. 고작 1년 살았던 이집트에서, 돌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예수가 마술을 배우고 그때 배운 마술로 기적을 일으켰다니.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이적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한낱 마술로 치부되는 악담에도 진실의 일말은 담겨 있다. 예수가 이집트에서 살았던 것은 인정한다는 점이다.
마태복음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이집트로 갔다 돌아오는 길, 그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일은 과거 출애굽 이야기와 견줄 수 없는, 상상초월의 출애굽 역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어린 예수가 겪은 일은 모세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왕의 박해를 받고 외국으로 피신한 점 등이다. 그리하여 죽음의 땅과 죽임의 나라에서 생명과 살림의 나라로 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한 사람은 온 인류를 구원했다.
성탄절도 아닌데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하는 사정은 이렇다. 눈치 챘겠지만, 제주도 난민과 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찬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집트에서의 예수 생각이 났다. 그동안 어린 예수가 야만적인 헤롯의 칼을 피해 도망간 것으로, 그 일을 통해 구약을 성취하고 구원을 이룬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망명자 예수, 난민 예수가 보였다. 국경에서 심사받는 요셉과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의 심정은 어땠을까.
현재 국제법의 난민 규정은 이렇다.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박해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로 인해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해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헤롯의 정치적 박해가 있었고, 왕과 국가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위협받기에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조국을, 고향을 등져야 했던 사람. 그래, 예수는 난민이었다.
일부 신약학자는 요셉이 예수를 데리고 알렉산드리아로 갔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 로마의 관할 지역이라 헤롯의 마수가 미치지 못하고, 유대인 백만명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이다. 나의 비학문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이집트의 작은 마을로 숨어들지 않았을까. 백만 유대인 사이에 헤롯의 끄나풀과 암살자가 없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는 어느 마을, 목마른 그 가족에게 물을 건네고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해준 동네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았을까.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이야기에 나오는 의인들처럼 말이다. 한때나마 예수는 난민이었다. 난민이었던 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제자들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김기현 (로고스교회 목사)
[시온의 소리] 이집트에서의 어린 예수
입력 2018-08-07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