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상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오해하거나 악용할 위험성은 항상 있어 왔다. 대표적인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오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므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오히려 은혜를 더하게 하는 것’이라는 궤변도 있다.
오늘날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결국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칭의의 복음을 오해하고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 한번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칭의를 통해 형벌을 면제받았어도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회개를 통해 계속 죄와 싸워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도 평생 죄와 싸웠다.
구원의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남용하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과 탐욕거리로 변질시키는 거짓 복음이 횡행한다(유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주신 것은 다시 죄에 얽매여 죄로 인해 망하는 거짓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경건과 선한 일을 통해 참 백성을 만들기 위해 주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는 은혜를 남용하고 왜곡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말로는 오직 성경을 외치고 정통 교리를 보수한다고 하지만 탐욕과 헛된 영광을 위해 분열을 계속하고 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은 외치지만 회개와 용서, 화평의 삶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경건하고 근신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참 백성이 되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서로 다투는 이유는 교만에 있다.(잠 13:10) 남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는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는 ‘오직 은혜’를 외치는 데서 끝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반목과 질시, 분열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한다.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님 은혜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돼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줘야
‘오직 은혜’의 핵심은 놀라운 구원을 거저 받았다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또한 성자 하나님의 철저한 순종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거듭난 영적 생명을 스스로 얻거나 누릴 수 없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택하심과 부르심의 결과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들을 우리 이웃과 나눠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생명의 복음을 나눠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물질을 포함한 모든 것, 심지어는 생명까지 기꺼이 나눠야 한다.
거저 받은 사람은 거저 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비워 두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찾아와 주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도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어 드린다. 그 은혜 앞에서 이기적인 주장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신 그 아들을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내어 주셨다. 우리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조건 없이 드려야 한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을 받고 누리는 자의 증거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 주신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와 상관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용서와 화목을
은혜의 복음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은 용서와 화목이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자는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심판하려 하기 때문이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을 수는 없다.(약 4: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에게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누린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간구하는 주기도문의 의미다.
우리는 주인에게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금액의 빚을 탕감 받고 나오는 길에 자신에게 겨우 100데나리온의 적은 돈을 빚진 동료의 멱살을 움켜쥐는 모습이 나의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한 용서는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부패한 자아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타인을 심판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주의 자리에 올라간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주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약 4:10) 모든 심판을 주께 맡겨야 한다.(롬 12:19, 벧전 2:23) 우리가 받은 은혜와 용서를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에게도 흘려보내야 한다. 이러한 순종은 무릎 꿇는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 하나님께서 용서할 마음과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의무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이 제자 됨의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참된 사랑만이 연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우리가 그 참된 사랑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다.
온갖 이기심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부패한 인간 본성으로는 참된 연합을 이룰 수 없다. 주님은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희생을 통해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이처럼 우리도 이기심과 헛된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형제와 화목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도우심 앞에 온전히 엎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화목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다. (엡 4:3)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와 용서, 우리 이웃과 나눠야
입력 2018-07-16 00:01 수정 2018-07-16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