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낸 아파트 관리비는 제대로 쓰이고 있을까. 줄줄 새는 아파트 관리비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정부와 국회는 2015년 ‘아파트 의무감사 제도’를 만들었다. 300가구 이상이 사는 아파트단지는 매년 의무적으로 회계사나 회계법인의 관리비 회계감사를 받도록 했다.
입주민들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회계감사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인터넷으로 옆 아파트단지의 관리비와 비교할 수도 있다.
2014년 ‘아파트 난방비 0원’ 의혹을 폭로하며 난방 열사란 이름을 얻은 배우 김부선(57)씨 같은 사례는 사라진 것일까. 내가 낸 아파트 관리비는 올바른 곳에 쓰이고 있을까. 회계사들이 ‘부실 감사’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아파트 감사 공영제’는 무엇이고,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그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20억원 쌓였는데…흙바닥 놀이터에 녹물 줄줄
지난 24일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만난 A씨(73·여)는 2014년부터 관할 경찰서를 수차례 드나들었다고 했다. “입주자대표라는 사람이랑 관리소장이 서로 짜고 관리비를 빼돌리는 것 같아서”라는 게 이유였다. 3000가구가 넘게 사는 이 아파트의 놀이터는 아직도 흙바닥이다. 1980년대 후반에 지어진 터라 수도관에서 나오는 녹물도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공동주택 정보관리 시스템(k-apt.go.kr)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전체 가구로부터 매월 7000만원가량을 장기수선충당금으로 걷었다. 써야 할 때 안 써서 쌓인 장기수선충당금이 20억원을 넘었다. 장기수선충담금 잔액은 너무 적어도 문제지만 너무 안 써도 문제다. A씨는 “이렇게 쌓인 돈의 이자는 어떻게 관리되는지 보여달라고 해도 관리소장은 ‘배 째라’ 식으로 나오고, 경찰서에 가도 별로 바뀌는 게 없었다”고 했다. 아파트 의무감사 제도 시행 3년이 지났지만 아파트 관리비를 둘러싼 잡음은 여전한 셈이다. A씨 아파트단지처럼 재건축이 불투명한 이웃 아파트단지도 매월 비슷한 규모의 장기수선충당금을 걷고 있다. 이 아파트단지는 장기수선충당금을 알뜰하게 쓰고 약 4억원만 남겨뒀다. 사용처도 입주민들에게 모두 공개했다.
300가구 이상이 사는 아파트단지는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9846곳에 이른다. 이들 단지는 공동주택관리법 제26조1항에 따라 매년 반드시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 회계감사 결과를 공개한 단지는 아직 2065곳(21%)에 불과하다. 나머지 79%의 아파트단지는 회계감사 결과를 밝히지 않았다. 공개 시한은 오는 9월까지다. A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역시 회계감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다.
회계사회 “이대로는 회계시장 교란”
아파트 의무감사 제도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회계사들은 “이대로는 회계감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모두 땅에 떨어진다”며 이른바 ‘아파트 감사 공영제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아파트 회계감사인을 지방자치단체 등 제3자가 지정하는 게 감사 공영제다. 아파트 관리비를 사실상 공공기관의 관리·감독 대상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현재 아파트 회계감사인은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고른다. 선정된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작성하면 해당 지자체에서 결과를 점검한다. 하지만 아파트 회계 비리의 상당수는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의 ‘유착’에서 발생한다. 설령 유착이 없다고 해도 입찰단가 기준으로 감사인을 선정하는 경우가 잦다. 최대한 많은 일감을 따내려는 회계사들이 저가 입찰을 일삼고, 자신을 선임한 입주자대표 측의 눈치를 보면서 부실한 감사보고서를 제출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회계사들의 주장이다.
한국공인회계사회 최중경 회장은 “피감기관이 감사인을 ‘셀프 선임’하는 곳이 아파트 관리비 감사 시장”이라고 꼬집었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감사가 필요한 곳은 (회계에) 문제가 있는 아파트들인데 정작 이런 곳은 입주자대표회의 등에서 감사를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회계사 B씨는 2014년 9월부터 약 9개월 동안 저가 입찰로 아파트 회계감사 701건을 무더기 수임했다. 그 가운데 599건은 속칭 ‘날림 보고서’로 남았다. 한 회계사는 “B씨는 현장에도 가보지 않은 채 적정 의견을 남발했다”고 전했다. B씨는 결국 회계사 등록이 취소됐다. 한국공인회계사회는 B씨 같은 사례를 막겠다며 ‘최소 100시간 이상은 감사하라’는 안내문을 2015년부터 일선 회계법인 등에 보냈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이런 움직임이 ‘가격 담합’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과징금 5억원과 시정명령을 내렸다. 회계사회와 임원 2명을 형사 고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외부 감사 제도를 이용해 회계사들이 이득을 챙기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회계사들은 “이번 기회에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외부 회계사를 선정하도록 제도를 개선하자”고 맞서고 있다.
감사 공영제 도입되면, 이득?
아파트 감사 공영제가 도입되면 입주민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올까. 명확한 손익계산서는 없다. 아파트단지마다 새는 금액과 감사에 소요될 비용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회계사회 측은 지난해 아파트 감사보고서 9387건 중 9000건을 분석한 결과 평균 2만3450원의 관리비 절감 효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감사 지적사항을 아파트단지 측이 충실히 따랐을 경우다. 반대로 아파트단지 1곳을 감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지난해 9월 기준 140만원 수준이다. 회계사회 관계자는 “이 비용이 설령 100만원 더 늘어난다 해도 500가구 기준으로 가구당 2000원 정도 증가하는 것”이라며 “이 돈이 부담스러워 셀프 선임을 해야 한다는 입주자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관건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입주민을 비롯해 사회 전체의 합의다. 감사 공영제를 도입하려면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외부 회계감사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도 있다. 관리사무소장 등이 모인 한국주택관리사협회는 법으로 외부 회계감사를 강제할 것이 아니라 입주민 요구에 따라 자율적으로 감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새는 관리비보다 회계감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도진 교수는 “공적(公的) 시장에 맡겨야 감사 가격 통제가 가능한 것이 아파트 관리비 감사”라며 “감사비가 비싸게 결정될 것이라는 우려도 공공기관의 개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And 경제인사이드] 당신 아파트도 부실 감사? 아파트 관리비 회계감사 결과 공개는 21% 뿐
입력 2018-06-28 04:00 수정 2018-06-28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