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나 3·1절 같은 국기 게양일에 집집마다 내걸리던 태극기가 눈에 띄게 줄었다. 반면 국가적 기념일이면 광화문광장 서울광장 등 서울 도심 곳곳에서 보수 단체가 주최하는 이른바 태극기집회가 열리고 있다. 나라의 상징인 국기가 특정 정치세력의 상징물로 여겨지면서 본래의 의미가 훼손돼 시민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호국 영령의 넋을 기리는 현충일인 6일 서울 마포구의 13층 높이 아파트에 태극기는 달랑 1개가 걸려 있었다. 옆 동의 아파트에는 아예 한 집도 태극기를 내걸지 않았다. 정부서울청사와 서울경찰청에서 가까운 종로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도 창 밖에 태극기를 게양한 가정은 한 곳밖에 없었다. 한 아파트에서 3년째 경비원으로 근무 중인 박모(57)씨는 “매년 태극기를 게양하는 가정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며 “태극기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아파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악구의 한 아파트 단지는 총 254가구 중 15곳을 제외하고는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았다.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는 총 119가구 중 태극기를 게양한 곳이 18곳 내외였다. 서대문구의 아파트는 855가구 중 태극기를 걸어놓은 가구가 17곳에 불과했다. 국민일보가 찾은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7곳에서 태극기를 게양한 가정은 60곳 정도에 그쳤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보면 애국심이나 호국영령보다는 태극기부대로 불리던 이들을 떠올렸다. 마포구에서 만난 진모(57·여)씨는 “보수단체 집회가 떠올라 태극기를 내걸기 힘든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휴일을 맞아 광화문광장에 나온 임모(39·여)씨도 “태극기부대 이미지 때문에 현충일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이들이 있다”며 “적어도 국기 게양일에는 정치적인 집회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건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모바일 설문조사 플랫폼 두잇서베이가 지난해 27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전체 응답자의 42%가 ‘태극기를 보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고 답했다.
이날 보수단체인 대한민국수호 비상국민회의는 광화문광장 옆 교보빌딩 앞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나와 집회를 열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국민대회’라는 이름을 내건 이 집회에서는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며 대한민국을 짓밟는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건너편 동화면세점 앞에서도 경찰추산 3000여명이 모여 ‘대한민국 공산화저지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들도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흔들었다.
보수단체들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등 국가적 기념일마다 서울 도심에 태극기를 들고 나와 집회를 열어 왔다. 지난해 광복절에는 애국단체총협의회, 새로운한국을위한국민운동이 종로구 대학로에서 구국국민대회를 열고 ‘박근혜 무죄’ ‘자유민주주의 수호’ ‘탈원전 반대’를 외쳤다. 지난 3·1절에도 극우·보수 성향 단체 회원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공휴일마다 서울 도심에선 태극기집회가 정례 행사처럼 열렸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태극기의 이미지가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기 시작했다”며 “여기에 반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결과적으로 태극기 게양에 소극적이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허경구 손재호 기자 nine@kmib.co.kr
‘태극기부대’ 때문에?… 현충일인데 텅 빈 게양대
입력 2018-06-07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