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이성규] 사과 안 하는 ‘사과상조’

입력 2017-11-02 17:57 수정 2017-11-02 21:36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별명은 ‘사과상조’다. 시원시원하게 사과를 잘한다고 붙여졌다. 김 위원장은 취임 이후 첫 공식브리핑에서 “나쁜 짓은 금융위원회가 더 하는데 욕은 공정위가 더 먹는다”고 했다가 최종구 금융위원장에게 사과했다. 이후 이해진 네이버 전 이사회 의장을 스티브 잡스에 비교했다가 이 전 의장은 물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게까지 사과했다. 심지어 자신이 지시하지 않은 일에도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는 지난달 국감에서 국민일보 기사와 관련해 무작위로 정보 유출자를 색출했던 공정위 행위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적폐 얘기만 나오면 태도가 달라진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외압을 비롯해 CJ헬로비전-SK텔레콤 합병 불승인 등 이미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공정위의 과오가 드러난 사건에 대해서도 “자연인으로서 아쉽다”고만 한다. 공정위원장으로서 책임감 없이 제3자적 시각을 취한다.

공정위의 가습기살균제 ‘면죄부’ 사건에서 김 위원장의 유체이탈 화법은 절정에 이른다. 공정위는 2012년 ‘가습기메이트’ 제조·판매사인 SK케미칼과 애경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무혐의 처분했다. 4년 뒤 국가가 가습기메이트 피해자를 인정한 뒤에도 공정위는 재신고 사건에 대해 사실상 무혐의인 심의절차종료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윗선’의 외압이 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에도 공정위는 ‘지금이라도 재조사를 하면 두 업체를 처벌하고 고발할 수 있다’는 내부 ‘재심의 검토보고서’마저 묵살했다. 피해자들은 고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공정위의 이런 행태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고 감사원에 감사 요청을 한 상태다.

상식적으로 봐도 공정위의 직무유기가 명백한 이 사건에 대해 김 위원장은 ‘공정위는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지난 9월 뒤늦게 재조사를 지시하면서 가습기살균제 평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국회에서는 TF에 전권을 일임했다고 하면서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정치적 외압은 없다”고 말해 가이드라인 논란을 일으켰다. 김 위원장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 그는 지난 6월 취임 직후 재심의 검토보고서를 보고받았다. 하지만 공정위는 9월 환경부로부터 ‘해당 제품의 인체 위해성이 인정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고 나서야 재조사 입장을 밝혔다. 공정위 스스로 면죄부 판정의 잘못을 인정한 게 아니라 환경부 공문을 핑계로 ‘내부 감싸기’를 했다는 의혹을 사는 대목이다.

그는 왜 적폐청산에 소극적일까.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김 위원장은 ‘공정위는 적폐청산 대상이 아니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신념은 꺾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언론 등 외부 비판에 의해 바뀌면 패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 위원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공정위 내부 개혁은 정치권과 언론 등 외부 압력에 떠밀려서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 위원장의 이런 소신은 시민활동가로 살아온 전력을 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시민사회에서 신념은 생명이다. 수십년 동안 삼성과 싸운 그가 삼성에 한 치라도 양보했다면 그것은 패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김 위원장은 이 정부의 ‘장관’이다. 자신의 소신이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한 발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는 2012년에 쓴 책 ‘종횡무진 한국경제’에서 개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혁은 혼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독단과 조급증은 금물이다.”

김 위원장은 2일 5대그룹 대표를 만났다. 지난 6월 간담회에 이어 2번째다. 그에 앞서 공정위라는 국가권력에 의해 피해 입고 상처받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하고 손을 잡아줬으면 어땠을까.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