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김남중] 트럼프와 반지성주의

입력 2016-11-10 18:53

트럼프가 이겼다. 다수가 지지하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 그게 민주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진 쪽에서 절규가 터져 나오고 세계가 공포에 휩싸이는 지경이라면 다수의 지배를 옹호하는 이 선거 민주주의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미국 시민들은 ‘이단아’ ‘아웃사이더’ ‘마초’라고 불렸던 남자를 선택했다.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전하는 세계 언론들의 분위기는 ‘경악’이고 ‘악몽’이다. ‘OH MY GOD!(세상에나)’ ‘I CAN’T LOOK!(눈 뜨고 못 보겠어)’ 같은 제목을 내건 신문들도 있다. 미국과 긴밀히 연결된 한국에서도 불안감이 높다. 트럼프를 찍은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여전히 지지하는 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지독한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6월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했을 때도 세계는 ‘충격’이었고 ‘공포’였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장기집권도,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의 당선도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세계의 상식과 다른 지도자들이 연거푸 선택되고, 선진국 시민들조차 고립주의적 선택을 자꾸 하는 데는 어떤 필연성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뉴욕시립대 교수)은 트럼프 당선 직후 쓴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 같은 사람 그리고 대다수 뉴욕타임스 독자들은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미국인의 선택에 대해 당혹감을 토로했다.

근래 출간된 책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는 아베 정권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지를 도무지 해석할 수 없다며 곤혹스러워하는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 우치다 다쓰루(고베여학원대 명예교수)의 고백이 나온다.

“국민 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고 평화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이러한 정책에 국민의 40% 이상이 지금도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는 것이 확실한 정책인데 국민은 지지를 보냅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지성주의는 이런 당혹스러운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불려나오는 말이다. 트럼프가 왜 이겼는가를 놓고 다양한 분석이 이뤄지고 있는데, 그 속에서도 반엘리트주의나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빠짐없이 거론된다. 이 분야의 명저로 꼽히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저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건국 이래 미국 사회의 밑바닥에는 지성에 대한 증오가 흐르고 있다며 이것이 반지성주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별로 공론화되지 않은 주제였다고 덧붙이면서.

그러니까 반지성주의는 지성의 결여나 부족을 뜻하는 비지성이 아니다. 지성적이라는 것에 대해 경멸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가 보여준 것도 비지성이라기보다는 반지성에 가깝다. 엘리트 정치인들이 귀족정을 펼치듯 정부와 국회를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민들 편에 서겠다는 그들의 약속이 번번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면서, 지성이라는 게 위선이나 거짓말의 수단으로만 쓰인다는 걸 알게 되면서 대중은 반지성주의를 키워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똑같으니 다 뒤집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트럼프에 표를 던진 것인지 모른다. 한국 국민들은 반지성주의와 무관할까? 지금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한국 국민들이 내년 대선에서 또다시 박근혜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닐지 모른다. 김남중 문화부 차장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