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동종이 울려 퍼지는 듯한 둔중한 감동이 온다. 작품 앞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이런 전시, 흔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제작한 주인공들은 모두 명실공히 현대미술의 거장들이다. 개념미술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미국의 조셉 코수스(75), 네덜란드 앵포르멜 창시자 알만도(87), ‘쌓아올린 오브제’로 유명한 영국 조각가 토니 크랙(67),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벨기에 설치미술가 마리-조 라퐁텐(66), 터키의 조각가 에이제 에르크먼(67), 체코 작가 막달레나 예텔로바(70)….
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현대미술 작가 13명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적이 다른 이들을 묶은 공통점은 1970년대∼1990년대 독일에서 살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공부하거나 혹은 후학을 양성했던 이들이다.
서울 관악구 서울대미술관에서 지난 12일 개막한 ‘아트스페이스 독일’전은 우선 거장들의 면면에 혀를 내두르게 하지만, 그 뒤에 숨쉬는 문화강국 독일의 힘을 느끼게 하는 전시다.
독일국제교류처(ifa)는 이 주제로 전시를 기획해 정부 예산으로 작품을 구입한 뒤 각국을 순회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천문학적인 가격대다. 2001년 독일에서 첫 전시를 한 뒤 15년째 이스탄불, 멕시코시티, 텔아비브, 시드니 등 20개 가까운 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타이페이에서 선보였다. 90여년 역사를 가진 ifa는 독일 미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설립된 정부 기관이다. 작품 설치와 철거를 지원하기 위해 고용된 작가 출신 2명이 방한하기까지 했다.
작품 설치를 한 토마스 카우폴더씨는 “1970년대 현대미술의 중심은 뉴욕이나 파리였다. 그런 시대부터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했고, 그 결과가 독일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고 전시 배경을 설명했다.
알만도의 대표작 ‘깃발’은 내면의 격렬한 투쟁에 대한 상징이자 풍경이다. 이는 독일 점령기, 나치강제수용소가 있던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상흔과 무관하지 않다. 체코 예텔로바의 사진작품 ‘대서양 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구축한 해안방어선 잔해를 작품화한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들을 현대미술 대표 작가로 우뚝 서게 한 교과서적인 작품들을 만난다는 눈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개념미술의 거장 코수스의 경우 실제 프라이팬, 프라이팬 사진, 프라이팬에 대한 사전적 설명을 나란히 배열한 ‘하나이면서 세 개인 팬’이 나왔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온 ‘일루전’(실물이 아닌 이미지)의 권위를 근본부터 흔든다. 백남준의 ‘인터넷 거주자’는 감시카메라,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으로 만든 사람 형상으로, 인터넷 시대 ‘빅브라더’를 진작에 예고한 것이다. 크랙의 ‘표류물’은 쌓아올린 그릇을 통해 조각의 권위를 비웃고, 라퐁텐의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는 불이 지닌 숭고한 특성과 공포의 상반된 성격을 제단화 같은 3개의 프레임안에서 구현한다.
정영목 서울대미술관장은 “이들 작가는 국경을 넘어 활동한 정신적 유목민 같은 존재들”이라며 “이들에 의해 추동된 독일미술계의 다문화적 경향과 독일 현대미술의 지형을 탐색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를 기념해 코수스가 방한, 내달 6일 서울대미술관에서 강연한다. 9월 25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묵중한 울림’… 현대미술 거장 작품 한자리에
입력 2016-08-17 0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