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태동이 삼척에서 비롯됐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일파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의 국운이 끝을 맺는다.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근덕면 궁촌리 공양왕릉(일명 궁촌왕릉)에는 왕자 왕석과 왕우, 그리고 시녀의 무덤이 함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공양왕과 그의 추종자들이 살해된 곳이 살해재이고 이곳에 한 달이 넘게 핏물이 흘렀다. 궁촌은 임금이 계신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공양왕릉(고릉)은 경기도 고양시에도 있다. 삼척 공양왕릉 안내문에는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로 보내 감시하다가 다시 간성으로 옮겼으나 불안해 1394년 3월 14일에 3부자를 궁촌리로 옮겼다가 한 달 뒤인 4월 17일에 모두 죽였다. 그 후 고양시 식사리 대자산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고 적혀 있다.
이성계가 삼척 땅에서 공양왕을 살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삼척은 조선의 건국이 시작된 곳이다. 조선 왕실 가장 오래된 선대 묘인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이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이양무(李陽茂) 장군 묘가 준경묘다. 목조는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르샤 천복이시니…’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준경묘 터는 왕기가 서린 천하의 대길지로, 조선왕조를 태동시켰다는 ‘백우금관(百牛金棺)’(100마리 소 대신 흰 소, 금관 대신 보릿짚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 전설이 남아 있다.
이양무는 본래 전주의 호족이었다. 그의 아들 이안사가 전주 관아에 소속된 관기를 좋아했다. 고려 고종 18년(1231)에 전주에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부임한 뒤 이안사가 아끼던 기생에 욕심을 냈다. 이 일로 다투게 된 전주 주관(州官)이 군사를 동원해 자신을 치려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안사는 황급히 삼척현으로 이주했다. 그를 따르던 170가구도 함께 나섰다. 이안사가 삼척으로 피한 까닭은 부친 이양무가 삼척이씨 이강제의 딸과 혼인했기 때문이었다.
이양무는 1231년(고려 고종 18년)에 죽었다. 이들은 의주로 이주하기까지 삼척에서 17년여간 살았다. 이양무 부인의 묘가 영경묘다. 준경묘에서 3.6㎞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다. 역사성 등 중요한 학술 가치를 인정받아 강원도 기념물에서 2012년 사적 제524호로 승격됐다.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로 가는 길은 험하다. 마을 입구에 들면 ‘준경묘 1.8㎞’라고 쓰인 표지판을 만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멘트로 포장된 급경사 산허리를 오르면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른다. 여기까지 1㎞.
다시 평행선을 긋듯 비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0.8㎞ 걸어 들어가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축구장 2개 정도 넓이의 탁 트인 분지가 열린다. 분지 상단에 잘 조성된 묘지가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금강송에 둘러싸여 있다. 현재 지름 60㎝ 넘는 궁궐재목 3000여 그루가 준경묘 근처 숲에 자라고 있다. 2008년 2월 방화사건으로 전소된 국보1호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소나무 20그루가 2008년 12월 10일 준경묘에서 벌채됐다. 인근에는 ‘속리산 정이품송혈통보전을 위한 혼례식’이 거행된 신부목 미인송이 기품을 뽐내고 있다. 키 32m, 가슴둘레 214cm의 빼어난 용모를 지닌 소나무다.
신기면 대이리 동굴지대(천연기념물 178호)에 동굴 55개가 있다. 모두 물과 오랜 시간이 빚어낸 자연의 예술품이다. 이 가운데 대금굴과 환선굴이 개방됐다. 동굴 생성 시기는 고생대(5억 3000여만년 전)로 알려졌다. 에그프라이 석순, 곡석, 종유석, 동굴진주 등 동굴 생성물이 기기묘묘하다. 특히 지하에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많은 양의 동굴 수가 흐르고 있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동굴 호수가 형성돼 있다. 대금굴의 경우 홈페이지(samcheok.mainticket.co.kr)에서 사전예약해야 하고 모노레일을 타야만 입장할 수 있다.
도계읍 무건리 육백산(해발 1244m) 허리춤에 꼭꼭 숨어 있는 이끼계곡은 무릉도원이다. 태곳적 자연을 고이 간직한 두리봉과 삿갓봉 사이 성황골에 있다. 백두대간 첩첩산중에 박혀 있어 가는 길이 만만찮지만 태초의 모습을 보기 위한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38번 국도 고사리에서 현불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산기리(산터 마을)가 나온다. 여기서 포장도로를 따가 가면 석회암 채굴장을 거쳐 소재말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큰말을 거쳐 용소까지 4㎞ 정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 마을을 벗어나면 이내 포장도로에서 비포장 임도로 바뀐다. 임도는 똬리를 튼 뱀처럼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한쪽은 아찔한 절벽이다.
3㎞쯤 가면 임도가 끝나고 우측으로 뚫린 오솔길과 비탈길을 500m가량 더 간다. 처음 만나는 폭포는 7∼8m 높이의 이끼를 가득 품은 주름치마를 펼친 모양이다. 좌측 절벽의 밧줄을 타고 위로 올라서면 진짜 경치가 펼쳐진다. 10여m 높이의 어둑한 절벽 아래 이끼 무성한 바위 사이로 물줄기가 비단치마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다. 푸른 이끼에 저절로 힐링이 되고 스며나오는 냉기에 더위는 저멀리 물러난다.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장호항은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중 하나다. 맑은 초록빛 바닷물과 아담한 항구가 잘 어우러져 있어 7번 국도가 숨겨 놓은 보석 같은 어촌마을 중 하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선 한적함과 소담한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항구에는 고깃배들이 그림처럼 떠있고 붉은색 지붕이 처마를 맞댄 바닷가 마을은 그림엽서처럼 이색적이다. 둔대암 앞 잔잔하고 투명한 바다 위에는 투명카누를 타고 청정 바닷속을 관찰하고 수리바위 인근에서는 스노클링을 통해 바다를 체험하는 이들이 북적인다.
■ 여행메모
7번·38번 국도 따라 늘어선 볼거리
산토리니 풍 ‘쏠비치 호텔&리조트’
강원도의 동남쪽에 바다에 접해 있는 삼척시는 위쪽엔 동해시, 서쪽엔 정선군과 태백시, 남쪽엔 경북 울진·봉화군과 맞닿아 있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동해까지 간 뒤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된다. 삼척 여행에는 주로 7번 국도와 38번 국도가 이용된다.
해안가를 따라가는 7번국도 주변에는 58㎞의 청정해안을 따라 삼척·맹방·궁촌 등 20여개의 크고 작은 해변과 항구를 비롯해 공양왕릉, 새천년 해안도로, 해양레일바이크, 수로부인헌화공원 등이 있다. 태백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에는 준경묘와 영경묘, 대금굴과 환선굴, 무건리 이끼계곡 등이 이어진다.
삼척은 싱싱한 횟집과 계절음식점들이 많다. 살이 부드럽고 담백하며 국물이 시원한 곰치국과 해산물이 넉넉하게 들어간 해물찜과 해물탕 등이 별미다.
대명리조트가 지난 22일 새하얀 외벽과 코발트블루 빛 지붕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리스 산토리니를 콘셉트로 한 해양리조트 ‘쏠비치 호텔&리조트 삼척’(사진)을 개관했다. 지상 8층 규모의 호텔 1동, 지상 10층 및 7층짜리 리조트 2동, 지상 6층으로 된 노블리안 1동에 모두 709객실을 갖췄다. 10개 레스토랑과 카페, 지중해 동굴도시 ‘카파도키아’를 테마로 한 워터파크 ‘아쿠아월드 삼척’, 6개 컨벤션홀 및 다양한 부대시설 등도 마련됐다.
삼척=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