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 스며드는 열린 건축물… 현무암 닮은 잿빛 외벽·오름 닮은 나지막함

입력 2016-06-20 21:50
9월 24일 개관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색에서는 현무암의 검은색, 형태에는 오름의 나지막함을 살렸고, 주변에는 ‘곶자왈 체험장’을 갖추는 등 제주의 자연 속에 스며드는 건축물이다.
작업 중인 김창열 화백. 그는 어릴 때 조부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이런 기억이 되살아나며 80년대 중반 이후 물방울 그림은 한자와 만났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물방울 화가’ 김창열(89) 화백은 평안남도 맹산 출신이다. 제주는 제2의 고향이다. 월남해 경찰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떨어진 첫 발령지가 제주였다. 1년 6개월을 머물던 실향민 총각의 ‘제주 순애보’는 프랑스인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며느리에게 털어놓는 추억이다.

“제주의 이 부드럽고 검붉은 흙 좀 보게. 화산을 품은 검은 돌도 마찬가지야. 하와이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 없는 귀한 것이지.”

‘제주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족여행 중 시아버지가 흘리듯 하신 말씀이 현실이 됐다며 며느리 김지인씨는 새 건물 냄새가 나는 노출콘크리트 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난 17일 제주 한경면 저지리예술인마을. 이곳에 들어서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은 9월 24일 개관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건축물의 외장색은 김 화백이 좋아하는 현무암을 닮은 잿빛이다. 우뚝 솟기를 거부하는 듯한 단층 건물이 편안하다. 제주 오름을 연상시키는 8개의 입방체가 사이좋게 중정(中庭·건물 안 마당)을 둘러싼 형태. 중정에서 소라고둥 같은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면 나오는 옥상이 바깥 언덕과 이어지는 열린 구조다.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건축물이다.

지방자치단체 간 김창열미술관 유치 경쟁 끝에 제주도가 화백 측과 양해각서를 맺은 것은 2013년이다. 설계 공모(당선 아키플랜)를 거쳐 2014년 4월 공사에 들어갔다. 부지 9800㎡(2964평), 건축연면적 1587㎡(480평)에 92억원(국비 40%, 도비 60%) 예산이 투입됐다. 경주 유치가 무산된 이후 KBS ‘TV쇼 진품명품’ 감정위원인 제주 출신 양의숙 예나르 대표가 제안한 게 성사로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김 화백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화가다. 40년 넘게 그린 물방울 그림은 1970년대 초 파리의 ‘마구간 작업실’에서 탄생했다. 재불화가로 살던 그의 물방울 그림을 한국에 처음 알린 이는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이다. 1976년 첫 개인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날 미술관에서는 제주도와 한국미술평론가협회 공동 주최로 ‘김창열의 미술세계’ 세미나가 열렸다. 물방울의 의미를 미술평론가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씨는 “한국전쟁 때 겪은 처절한 삶의 체험이 응고된 상징적 형태”, 유진상 계원예술대교수는 “탄흔과 상흔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정화와 순수함의 결정체”라고 해석했다. 기혜경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관 운영부장은 “오목과 볼록의 음양 원리를 형상화한 것”이라며 동양성에 주목했다.

김 화백 측은 미술관에 220점에 달하는 대규모 기증을 했다. 초기 앵포르멜(전후 불안을 담은 서정적 추상) 작품에서 말년의 ‘물방울과 한자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시기별 주요 품을 망라한다.

문제는 코앞으로 다가온 개관기념전이다. 현대화랑 박 회장, 김선희 전 대구미술관장 등 자문위원들은 “아무리 컬렉션이 우수해도 전시 담론이 없으면 미술관이 제 역할을 하기 힘들다”며 관장 공모를 서두를 것을 주문했다. 제주도는 7월 초 관장 공모 계획이어서 늦은 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제주=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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