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종의 환자 샤우팅] 진료빙자 성추행-오해로부터 벗어나려면…

입력 2016-01-03 18:24

대한의사협회는 2001년 11월 15일 ‘의사윤리지침’을 제정·공포했다. 78개 조항의 ‘의사윤리지침’에는 의사는 의료행위와 관련 환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되고, 의사는 내진을 하는 경우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제3자 입회 아래 시행해야 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의사협회 정관 및 징계규정에 따라 징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의사가 진료를 빙자해 환자를 성추행했다면 당연히 ‘의사윤리지침’ 위반으로 징계를 받는다. 그런데 의사협회가 2006년 ‘의사윤리지침’을 개정하면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진료빙자 성추행 금지조항’과 ‘내진 시 제3자 입회조항’이 삭제됐다. 대한한의사협회는 ‘한의사윤리지침’ 자체가 없다.

2013년 8월 한 한의사가 허리통증으로 한의원을 찾은 여중생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에 손을 넣어 아픈 부위의 혈을 누르는 ‘수기치료’ 후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다. 이 사건에 사회적 관심이 쏠린 이유는 17차례 치료 중 가족과 동행한 10차례는 핫팩, 침, 전기치료 등과 같은 ‘일반치료’를 했지만, 여중생 혼자 한의원에 간 7차례는 진료실에 간호사도 없는 상태에서 커튼을 치고 ‘수기치료’를 했기 때문이다. 여중생은 같은 한의사에게 성추행 피해를 본 다른 여고생과 함께 형사고소를 했다. 그러나 2015년 2월 5일 1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일관되고 피고인이 수기치료 명목으로 추행을 한 것에 강한 의심이 든다”면서도 “시술 과정에서 피고인이 피해자들의 성기 부위 등을 만진 것이 추행 목적에 기한 고의적 행위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했다. 피해 여중생은 1심 재판 결과가 나온 후 “법관조차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데 절망했다”며 자해를 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까지 받았다. 해당 사건은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진료빙자 성추행 빙자 대안으로 의료계에서는 환자가 안심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진료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범죄를 사전에 막는 자율제도 ‘샤프롱(chaperone)제도’ 도입을 제시했다. 이는 영국의 General Medical Council(GMC)에서 주도한 제도다. 샤프롱은 진료실 등에서 여성, 미성년자, 정신지체 환자 등을 진료할 때 가족이나 보호자, 간호사 등이 함께 있게 함으로써 환자를 안심시키고 진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성범죄 등의 행위를 사전에 방지하는 제도다. 미국은 의사회에서 샤프롱제도를 진료현장에 적용토록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윤리지침’에 들어가 있던 ‘진료빙자 성추행 금지조항’과 ‘내진 시 제3자 입회조항’이 2006년 삭제된 것을 고려하면 국내에서는 의사협회나 지역 의사회가 ‘샤프롱제도’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한의사의 여중생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국내도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 관련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법’은 의료진이 성추행 우려가 있는 신체 부위 진료시 환자에게 미리 진료 부위와 이유, 원하지 않을 경우 진료 거부권 등에 대해 사전에 의무적으로 알리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응급의 경우를 제외하고 진료 시 의료인 이외 간호사, 보호자 등 제3자가 의무적으로 동석하도록 하는 것이다.

샤프롱제도 도입이나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법 등에 대해 의료계와 한의계의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의사와 환자 사이를 서로 믿지 못하는 관계로 규정한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이는 의료인을 잠재적 성추행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진료를 환자가 성추행으로 오해하는 것을 예방하는 가교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의사협회는 신속하게 ‘윤리지침’에 ‘진료빙자 성추행 금지조항’과 ‘내진 시 제3자 입회조항’을 포함해야 하고, 위반시 엄중한 자율징계권을 행사해야 한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우선 ‘한의사윤리지침’부터 제정해야 한다. 또한 지역 의사회 중심으로 ‘샤프롱제도’를 도입해 환자의 프라이버시와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의료계와 한의계가 자발적으로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를 위한 자구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최후 수단으로 국회가 나서서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