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이렇게 흥분하며 전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오늘 본문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냈을 때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구체적인 실체로 보여주셨을 때 그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실체를 세상에 보여주셨는데, 제대로 보여주셔서 성공했다는 숨 가쁜 외침입니다. 그리고 ‘평화’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다른 것이 녹아서 한 덩어리가 됐을 때를 말합니다. 전쟁하지 않고 사회가 안정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구원할 영혼들이 한 덩어리로 접합돼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진의를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셨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환호성이 터지고, 땅에서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직 모르고 있지만 이 순간 하나님과 완전한 한 몸으로 연결돼 버렸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런 일입니다. 하늘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땅에서도 엄청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 버린 그런 사건입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이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목동들만 알게 하신 것은 비밀스럽습니다. 이 비밀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시겠다고 제의하셨고, 그 출입문은 ‘토단(土壇)’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출 20:24). 하나님의 직접 강림은 이것이 최초입니다. 토단은 아무런 장식을 하지 말라, 거기에 어떤 것이라도 섞이면 ‘다른 신’을 섬긴 것으로 쳐서 문을 닫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토단은 이처럼 간단하고 소란스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밤에 그 토단을 딛고 이 땅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토단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목동들이 토단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실 때 비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타고 안착하셨습니다. 목동들은 천사들이 말해준 대로 아기 메시아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떻게 찾았을까요. 그들은 동네 안으로 들어가서 각 집의 안방을 수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뒷간에 있는 컴컴한 외양간만 뒤졌더니 핏덩어리 아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두 번째 토단은 외양간 같은 곳입니다. 온기도 없고 쥐와 벌레가 버글거리고 소독된 가위도 모포도 씻을 물이나 대야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길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곳이라고 해서 자책하거나 의분을 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토단은 그런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심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탄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이런 토단입니까. 그 길로 오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잘 만나고들 있습니까. 열심과 충성과 알량한 성경지식으로 맞이하려다가 날마다 퇴짜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기독교인의 신앙은 열심이나 충성이나 직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조건대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과거의 방식들, 과거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뜯어내고 다 토단으로 고쳤으면 합니다.
민걸 목사(교회다움)
[오늘의 설교] 예수님, 토단을 딛고 오시다
입력 2014-12-31 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