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계속되는 유가 하락세가 전 세계 부(富)의 연쇄 이동을 촉발하고 있다. 산유국과 정유회사를 배불리던 거대한 ‘에너지 카르텔’이 붕괴될 전조가 보인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우리 경제에도 큰 호재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6월 최고가 대비 40%나 폭락한 유가 하락세가 역사상 손꼽히는 ‘부의 이동’을 가져올 것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특히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유가 방어를 위한 원유 감산을 포기하면서 이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정학적 이점에 힘입어 막대한 이익을 챙겨오던 산유국들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OPEC 국가들의 연간 수익은 전년 대비 5900억 달러(약 655조3720억원)나 줄어들 전망이다. 영미권 대형 정유업체들도 주가가 반 토막 나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
WP는 원유 생산자들의 손해가 연간 1조5000억 달러(약 1666조6200억원)에 달한다고 전했다. 기름값이 싸지면서 원유를 많이 도입하는 나라들에선 경기 부양 효과로 이어져 세계 경제는 0.5∼1%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7%에 달하는 우리나라도 직접적인 수혜자 중 하나다. 윌리엄 더들리 뉴욕연방은행 총재는 “유가 슬럼프가 유럽 일본 등 각국 정부의 금융완화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 하락 효과는 소비심리와도 직결된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미국 운전자들은 지난 6월과 비교해 매일 6억3000만 달러(약 6998억원)의 기름값 절감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여유자금은 고스란히 시장 활성화와 기업의 수익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각국에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커지면 우리의 수출도 늘어나게 된다. 특히 정보통신(IT)과 자동차 등 우리의 주력인 소비재 산업의 실적 개선이 기대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OPEC의 생산조정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생산량을 하루 970만 배럴에서 낮추지 않고 있다. 셰일가스 등 대체에너지가 시장 점유율을 잠식해 ‘석유 카르텔’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평가다.
OPEC 내부의 불협화음도 감지된다. “저유가 정책은 매우 위험 부담이 큰 전략”이라며 감산을 요구해온 이란이 대표적이다. 저유가 정책의 주요 타깃인 미국 셰일가스 생산량은 하루 400만 배럴에 달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다른 OPEC 국가들의 하루 생산량을 이미 넘어섰다. 에너지 시장이 기존 산유국 중심의 독과점 체제에서 경쟁 체제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가 하락의 최대 피해국은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석유 판매에 의존해온 러시아다. 저유가가 장기화될 경우 경제 위기와 함께 국제 정치무대에서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란 역시 석유판매 수입이 줄면서 서방과의 핵 감축 협상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베네수엘라도 기존의 경제위기에 석유수입 감소가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유가 폭락에 富의 세계지도가 바뀐다
입력 2014-12-04 0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