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문화재 보존·복원을 이끄는 본부에서 배불뚝이 ‘CRT 모니터’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피렌체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30여분을 달리니 문화유산보존진흥연구소(ICVBC) 피렌체 본부가 나왔다. ICVBC는 이탈리아에서 이뤄지는 모든 문화재 보존·복원 활동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복원에 직접 나서는 대신 과학을 기초로 복원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과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복원할 때도 ICVBC는 현장에서 각 분야 전문가와 기술, 장비의 협업을 조정했다.
ICVBC 본부 내 작은 방 안에서는 한창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다. 돌 위에 곰팡이를 배양하는 방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 방에선 컴퓨터로 석재 벽면의 단층을 촬영 중이었다.
본부 직원이 ‘고가 장비’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고가라는 컴퓨터의 가격과 제작업체, 기종을 물어봤다. 기자가 보기에도 컴퓨터 성능은 최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도 한쪽에선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보기 힘든 구형 CRT 모니터가 보였다.
직원은 피렌체 본부에서 사용하는 장비의 총 가격이 30억원이라고 말했다. 최신 장비를 갖춘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ICVBC 마리아 페를라 콜롬비니 소장이 의미 있는 한마디를 건넸다.
“결국은 사람 아닐까요. 문화재 복원을 위해 수백년에 걸쳐 보존·복원 전문가를 양성했고 그 노하우가 쌓였습니다. 장비와 기술은 사람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유물 주치의’를 양성하는 곳
콜롬비니 소장의 말을 듣자 앞서 5일과 7일 방문한 로마의 고등보존복원연구소(ISCR) 국립복원학교(SCUOLA)와 피렌체의 국립복원연구소(OPD)가 떠올랐다.
연구실엔 고개만 돌려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급 작품들이 즐비했다. 1481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작인 유화 ‘동방 박사의 경배’부터 현대 미술의 아이콘 잭슨 폴락의 100억원대 회화는 OPD 연구실에 무심하게 걸려 있었다. 베네치아 산 자카리아 성당의 제단화인 안토니오 비바리니의 작품은 SCUOLA 연구실 창가에 한가롭게 세워져 있었다.
이 작품들은 ‘유물 주치의’라 칭하는 전문가들의 손길을 거쳐 새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전문가의 곁에는 학생들이 함께했다.
두 교육기관은 문화재 보존·복원에 최적화된 인재를 육성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OPD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이끌었던 1588년 세워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복원기관 중 하나다.
로마의 SCUOLA도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는 교육기관이다. 문화유산 보존·복원 분야의 대표적인 저서로 꼽히는 ‘복원론’을 쓴 체사레 브란디가 1939년 중앙복원연구소(ICR·현재 ISCR)를 설립하면서 산하 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국보급 작품도 학생들이 직접 복원
두 학교의 운영 방식은 비슷하다. 입학 정원과 학비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OPD의 경우 등록금 일부를 학생이 부담하고 한 학년 입학 정원은 5명으로 제한했다. 5년 과정이다. 해마다 10명 안팎의 학생을 선발하는 SCUOLA엔 이미 미술사, 고고학, 화학 등 관련 분야 전공을 이수한 인재들이 지원한다. 학비는 집안 형편에 따라 다르다. 연간 500유로(약 70만원)에서 2500유로(약 345만원)까지 다양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OPD는 입학과 동시에 전공 분야를 정해야 하고 SCUOLA는 2학년 과정을 마친 뒤 전공을 결정한다.
두 학교는 학생들이 졸업한 후 곧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국보급 작품으로 실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SCUOLA 신입생인 스페인 출신의 라켈 델가도(23)는 “교육과정의 절반이 실습이고 교수 1명당 학생 수가 5명을 넘지 않는 게 좋다”면서 “졸업 뒤 이집트, 중국 등 세계 각지의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장에도 직접 나간다. OPD는 올여름 볼로냐의 페트로냐 성당 조각 복원에 전문가와 같이 학생들을 투입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기술보다 철학
단순히 보존·복원 기술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복원하는 사람의 직업적 윤리 의식을 알려주는 한편 문화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역사·문화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SCUOLA의 도나텔라 카베찰리 교장은 “학생들은 훼손된 유물을 치료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면서 “기술 습득과 더불어 학생들이 문화재 보존·복원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학문적 관점을 세우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학교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이 문화재를 왜 복원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다 보니 복원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다.
정수희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 문화유산보전복원센터 박사연구원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 국가의 문화재 보존·복원 교육기관에서는 역사 윤리 과학 철학 미학 등을 함께 가르치고 있다”면서 “그래야 불필요한 복원을 피하고 최적의 복원 방향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마·피렌체=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문화재 관리가 국력] 기술보다는 철학이 먼저다
입력 2014-11-29 03:05 수정 2014-11-29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