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구영교회] 외침을 막기위해 쌓은 성 믿음의 성으로 다시 서다

입력 2014-11-29 02:18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벽 위에 설립된 구영교회
임진왜란 무렵 쌓은 왜성. 멀리 구영교회와 바다가 보인다.
1988년(왼쪽)과 2014년 교인들의 교회 앞 기념사진. 오른쪽 사진의 뒷줄 왼쪽 두 번째가 홍두규 목사이다. 뒷줄 왼쪽 끝과 오른 쪽 끝은 강만길·신대영 집사.
저 남해안 거제도의 한적한 어촌 구영리. 70여호 남짓한 반농반어 이 마을의 공공시설은 보건진료소가 전부다.

또 하나를 굳이 꼽으라면 120년 전 세워진 교회다. 한데 그 교회 예배당은 1490년 왜구 침입을 대비해 쌓았다는 진성(鎭城) 성벽 위에 우뚝하다. 심지어 예배당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100걸음만 나아가면 잔존 왜성(倭城)이 마을 이장집 축대로 쓰인다.

이 진성과 왜성 터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큰 섬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이 섬이 임진왜란 당시 ‘칠천도 전투’ 현장이다.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밀어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벌어진 전투에서 왜군에 대패하고 12척의 배만 건진 곳이다. 이 칠천량에는 궤멸한 조선 함선과 거북선 다섯 척에 대한 인양 시도가 종종 화제가 되곤 한다.

그 성벽 위의 예배당은 경남 거제시 구영교회이다. 임진왜란 무렵 구영교회가 있던 마을 지명이 영등(永登)이었고, 그 포구를 영등포라고 불렀다. 여기에 요즘으로 치자면 해군기지 진성(鎭城) 영등성이 축성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등성은 칠천도 전투 패배와 함께 왜군에 접수됐고 그 성돌은 왜성 축성의 재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鎭)이 안전한 곳으로 옮기면서 영등은 ‘구(舊)영등’으로 남게 됐다. ‘구영교회’가 된 이유다.

지난주일 새벽 6시 무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구영교회로 향했다. 버스는 5시간여 걸려 거제시청이 있는 고현읍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여 굽이굽이 휘도는 바닷길을 따라 구영리에 닿았다. 거제-부산을 잇는 8.2㎞ 길이의 거가대교 시작점이 구영교회에서 3㎞ 떨어져 있었다.

마을은 바다를 향해서만 열려 있을 뿐 460m 높이 대봉산 줄기에 갇혀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버스가 들어올 수 없는 오지였다. 전기 공급도 이 무렵 이뤄졌다. 아이들은 십리(4㎞) 산길을 걸어 농소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농소초교는 폐교됐다.

이날 구영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올렸다. 15명 남짓한 70∼90대 여성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유모차에 의지해 느릿느릿 경사진 교회 길을 따라 출석했다.

묵상기도로 시작된 예배는 강만길(72) 집사의 기도와 찬송 373장 ‘고요한 바다로’로 이어졌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라는 가사다.

홍두규(61) 목사는 이날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믿음 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일본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목사의 말씀을 인용해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며, 신앙은 감사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같은 죄인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받으나 아니한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포로로 묶인다”고 말했다.

예배가 끝나고 현관을 나서자 교인들 손에 큼직한 사과 한 알과 귤 두 알이 든 비닐봉투가 하나씩 쥐어졌다. 추수감사절 떡인 셈이다. 홍 목사와 사모는 이들을 예배당 뒤쪽 사택에 마련된 ‘추수감사절 밥상’에 모셨다. 밥상은 평소 주일과 달리 풍성했다. 무엇보다 귀하다는 물메기탕이 올랐다. 순두부를 입 안에 떠 넣은 듯한 식감이었다. 여성 교인은 사택 안방에서, 남성 교인은 목사 서재에서 상을 받았다.

“올해 첫국이라요. 강 집사님요. 얼마 줬는교? 한 마리 2만원요. 마이 잡수소. 한 그릇을 잡숴도 밥값 내야 하이 마이 잡수소.”

교회 운영 전반을 맡은 신대영(64·거제중앙라이온스클럽 회장) 집사가 농담을 했다. 강·신 집사는 평생 구영리를 기반으로 살아온 이들이다. 이들 역시 반농반어 하며 살았다. 교인이 적어 교회법상 장로 임직이 쉽지 않아 집사 직분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 말로 ‘초등반’에 속하는 젊은 축이다. 남성 교인 중 가장 젊은 신 집사는 “60대 초반 아내 나이는 설거지해야 하는 게 시골 교회 현실”이라고 했다.

신 집사는 40대 초반 선주가 되어 고기를 잡았다. 첫 출어를 받던 날 그는 무당으로부터 택일을 받았다. 한데 만선은 고사하고 선원 부상만 안고 돌아와야 했다. 사고였다. 그 치료비 대느라 전 재산을 잃었다. 그리고 미신을 버리고 어린 시절 놀던 구영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풍금이 있었고, 추수감사절 송편과 성탄절 사탕·건빵을 받고 신나 하던 추억이 있던 곳이었다.

신 집사의 기억.

“6·25전쟁이 끝난 50년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미군 LSD(상륙용 주정 모함)가 구영등포에 정박해 훈련을 하곤 했어요. 그때 미군들이 사과를 먹고 있었어요. 우리가 ‘기브 미’라고 손을 벌려 외치면 사과 속만 남은 걸 백사장에 던져요. 우린 그걸 서로 달려들어 차지해 바닷물에 씻어 먹곤 했어요. 초콜릿과 껌 등도요. 미군은 할머니들이 담배 피우면 그게 신기하다며 사진을 찍곤 했죠. 그 뒤로도 우리 마을은 군인들의 상륙작전지가 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농사가 쑥대밭 되곤 했지요. 군인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진성과 왜성 성벽에서 놀던 신 집사는 미군과 한국군을 겪으며 성장했다. 중학교는 장목면사무소가 있는 장목중학교를 다녔다. 그 거리가 8㎞였다. 산길을 걸어서 왕복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신 집사는 현재 자녀 교육을 위해 고현 시내에 산다.

구영교회 터는 정확히 구영등성 북문 자리다. 한때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멀리 동쪽 가덕도와 북쪽 마산포(현 마산·창원)를 감시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잔존 왜성 성벽 위는 동헌이 자리했었다. 이 동헌 마루에서 영등성 만호(萬戶)가 경상우수영 관할 바다를 한눈에 경계했다.

사료에 따르면 부산 앞바다로 왜적이 침입하자 원균은 승산 없다고 판단하고 군선과 군사시설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려했다. 이에 영등포 만호 우치적, 옥포 만호 이운룡 등의 원균 부하가 항의했다. 원균은 어쩔 수 없이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 가까스로 연합작전을 펼 수 있었다.

구영교회는 이처럼 역사의 아픔 한가운데 있다. 조선 성종 때 쌓은 성과 임진왜란 때 쌓은 왜성이 군데군데 잔존한다. 교인들이 어린 시절 뛰놀던 치성과 옹성은 구영천 사방공사를 위해 빼내 기단 만 겨우 남았다. 왜성 또한 원형에 시멘트가 덧대진 채 어느 집 담으로 쓰인다.

교회는 이 역사의 흔적을 보존할 힘이 없다. 미자립 교회인 데다 젊은 교인이 없으니 교회사를 정리할 여력도 없다.

그렇기에 홍 목사와 강·신 집사의 기도제목은 교회를 대대손손 잇는 일이다. 전도 대상조차 없는 악조건 속에서 새벽기도, 수요예배, 주일 낮예배 등을 거르지 않고 이어 나가는 이유다. 무너진 성벽을 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믿기 때문이다.

설립 120주년 맞은 작은 어촌 교회… 역사교회로서 연구와 관심 절실

구영교회는 올해 설립 120주년이다. 한국 선교 130주년인데 그 한적한 어촌에 120년 교회가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1894년에 웅천(마산) 주성윤씨로부터 이 마을 신삼동씨가 복음을 받았다. 1919년 처음으로 예배당을 김세율씨 등이 주축이 되어 초가 3칸으로 지었으며 1960년 3월 8일 신양해씨 등이 주축이 되어 양철제 5칸을 건립했다. 1973년 이일장 전도사 외 교우들이 바로크식 양옥 교회당(현재) 30평을 건립했다.’

이것이 구전 등을 정리한 구영교회 측 약사다. 교회에 남은 자료는 1988년 발간된 간단한 화보 중심의 책자가 전부다. 교회사가들은 경남 마산·통영 지역 첫 전도자인 호주장로교회 소속 앤드루 아담슨(1860∼1915)에 의한 복음 전파로 구영교회가 설립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담슨은 1894∼1914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따라서 자료 등을 종합할 때 구영교회 설립은 1900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구영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단의 연구와 관심이 절실한 역사교회였다.



거제=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