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헌종 8년) 일흔아홉의 노인이 백여 권의 책을 눈앞에 두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있다. 1813년 나이 쉰, 벼슬에서 물러난 지 8년째 되던 해 시작한 책을 30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병석의 노인은 시중드는 자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고는 곡이 끝나자 죽었다.
이 노인의 이름은 서유구(1764-1845)다. 서유구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 가운데 가장 덜 알려진 경우에 속한다. ‘임원경제지’라는 책을 편찬한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유구 연구자들은 서유구를 ‘조선 최고의 스타’ 정약용과 나란히 세운다. 심지어 서유구야말로 ‘실학의 집대성자’라는 타이틀을 가질만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영·정조 시대와 실학을 다룬 책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지만, 서유구는 여태껏 무명 신세였다. 이유는 그의 책이 너무 방대하고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지는 113권이나 되는 책이다. 글자수가 252만자, 표제어만 2만8000여개에 달한다. 또 다루는 분야도 농사, 경제, 축산, 의학, 상업, 의례, 건축, 음식 등 열여섯 가지나 된다. 이런 규모의 저작은 그 시기 한·중·일을 통틀어 임원경제지가 유일하다. 1980년대부터 조선시대 기록물에 대한 번역이 활발해지지만 임원경제지는 번역되지 못했다. 다행히 ‘임원경제연구소’ 학자들이 10여 년 전부터 번역을 진행해와 완역을 앞두고 있다.
연구자들은 임원경제지가 번역되면 ‘풍석 르네상스’가 일어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재야 연구자 진병춘씨가 쓴 ‘풍석 서유구’는 서유구에 대한 본격적인 첫 평전으로 ‘서유구 르네상스’의 서막을 여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자학이 지배하였던 500년 조선사의 그늘과 한계를 완벽하게 극복한 유일한 인물.” 저자는 서유구를 이렇게 평가한다. “완벽하게”라는 수식이 눈길을 끈다. 여러 실학자들에게서 ‘부분적’ 극복이 나타난다. 그러나 “완벽하게 극복한” 경우는 서유구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지금 온 천하의 물건 가운데 우주를 통틀어, 그리고 고금에 걸쳐 단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곡식이다. 지금 온 천하의 일 가운데 우주를 통틀어, 그리고 고금에 걸쳐 신분이 높건 낮건 지혜롭건 어리석건 간에 단 하루라도 몰라서는 안 되는 것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농사다.”
실용이 실학자들의 공통된 태도이긴 하지만, 서유구보다 더 철저하게 실용을 궁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임원경제지 서문에 “이 책에 ‘임원’으로 제목을 붙인 까닭은, 벼슬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다”라고 적었다. 그는 벼슬이나 정치를 통한 구제를 믿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 자식이고,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 도합 32년간 벼슬 생활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유구의 이 같은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뼛속까지 사대부였지만 민생을 개선하는 건 경세학이 아니라 실용적 지식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이해했고, 50세 이후의 삶을 온통 임원경제지 편찬에 바쳤다. 서유구의 각성과 전환에는 16년간의 첫 번째 벼슬 생활을 끝내고 나이 마흔 셋에 시작한 17년에 걸친 방폐기(放廢期·정치적인 이유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던 기간) 경험이 결정적이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육십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기까지 서유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집을 지으며 식솔들을 건사했다.
주자학의 나라에서 주자학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서유구는 철두철미하게 실용적인 태도로 편찬한 임원경제지를 통해 주자학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새로운 지식인의 초상을 보여줬다. 당시 실학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흡수했다고 하나 결국은 주자학 체제 속으로 포섭되었고 또 하나의 경세학이나 통치학이 됐던 점에 비춰보면 서유구는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서유구는 지식의 목적, 지식의 대상, 지식의 주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이고 철저한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며 “임원경제지는 조선 사대부들이 배우고 익혀온 경학이나 개혁적 사상가들이 주창한 경세학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지식 체계였다”고 평가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뼛속까지 사대부 ‘서유구’ 알고보니 실학의 최고봉
입력 2014-11-28 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