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을 본 다음날, 남자 쪽에서 우리 집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결혼이 이리 급하게 이뤄질 줄 몰랐던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머니도 결혼하라고 권유하셨다.
“성자야, 우리도 네가 그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과 결혼하면 너도 미국에 가 피아노 공부를 계속할 수 있지 않겠니?”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절대로 유학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 역시 별로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가 계속 생각났다. 확고한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고백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만한 신앙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들지도 몰라. 만약 정해진 짝이 있다면 혹시 이 사람이 아닐까.’ 이 생각이 문득 떠오른 순간, 어머니는 마치 내 생각을 읽고 계신 양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자야, 엄마가 네 배우자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잖니.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할 때 환상 중에 보았던 네 배우자의 얼굴이 바로 어제 만난 그 청년이더라….”
자식의 앞길을 담보로 거짓말을 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어머니는 모두가 인정하는 기도의 어머니셨다.
수요일에 남편을 처음 만나 맞선을 보고 그 다음주 목요일 전격 결혼식을 올린 데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이 됐다. 만난 지 1주일 만에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음에도 오래전부터 준비된 결혼식처럼 마음이 편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위해 주야로 간구하셨던 아버지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번갯불에 콩 볶듯 속성으로 치른 결혼식 후, 3∼4개월의 수속기간을 거쳐 바로 한국을 떠난 내게 미국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우선 틈틈이 공부했던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집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 후 1년 동안은 시어른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집안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도와 목회, 노동으로 채워지는 시부모님을 바라보는 것도 갓 결혼한 새댁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일 다녀올 테니 오늘은 시금치 좀 무쳐 놓으렴.”
며느리에게 반찬 몇 가지를 부탁하고 나가시는 시어머니를 배웅한 뒤 나는 혼자 안절부절못했다. 결혼 전 부엌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못했던 사람이 결혼했다고 해서 제대로 할 리 만무했다. 그러다 보니 신혼시절 자잘한 실수와 시행착오들이 이어졌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밤마다 경영공부에 매진하는 남편은 또 얼마나 바쁜지. 가뜩이나 연애도 하지 않고 결혼한 우리 부부에게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대화가 부족하기만 했다. 남편의 미국식 사고방식도 서로의 이질감을 부채질했다.
그런 상황에서 첫아이를 갖게 되자 그 기쁨과 설렘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위해 가만히 기도하고 있노라면 이 가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한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에 틀림없어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셨다는 남편의 조부모님, 부르심에 순종해 부와 명예를 버리고 빛도 없이 목회자로 사역하고 계신 시부모님, 그리고 선교사를 돕는 후원자가 되고 싶어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남편을 생각하니 하나님이 이 가정에 가장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고 싶어 하신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
믿음의 계보를 이을 자,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드러낼 자, 그간 우리 부부의 눈물을 씻어주며 위로할 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시리라 믿었다. 열 달이 지난 후 분만실에서 첫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와 남편은 함박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역경의 열매] 정성자 (3) 맞선 1주일만에 ‘속성 결혼식’… 낯선 미국 땅으로
입력 2014-11-26 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