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가 뉘어 있다. 온 힘을 다해 단숨에 붓을 내리 긋는다. 한국에서 살던 유년 시절, 전남 담양의 산골마을에서 어머니가 풀칠 할 때 쓰던 것 같은 귀얄붓이다. 7차례, 때론 5차례의 붓질만으로 작품 한 점이 완성된다. 그래서 독일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송현숙(62) 작가의 작업에서는 캔버스와 템페라 물감이라는 서양 재료를 썼음에도 일필휘지의 동양적 행위를 느낄 수 있다. 작품 제목에도 붓질 회수를 뜻하는 ‘5획’ ‘7획’ 등을 붙였다.
재독화가 ‘송현숙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에서 내달 31일까지 열린다. 2008년에 이어 6년 만이다. 그는 1996년 함부르크시가 수여하는 예술상을 받는 등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다. 횃대에 걸린 흰 천, 빨래를 고정시킨 바지랑대, 누런 장독 등의 이미지는 여전하다. 그런데 올올이 풀어헤친 흰 천의 펄럭임이 전에 없이 분방하다.
지난 14일 전시 개막식에 들른 이태호(62)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전에는 선이 다소 정제돼 있었다. 이번엔 일부러 곱게 하려던 것들을 툭툭 털어냈다. 붓질이 살아났다”고 호평했다. 송 작가와 이 교수는 1985년 제자와 스승으로 만났다. 송 작가는 독일 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한국을 찾아 당시 이 교수가 적을 둔 전남대에서 한국미술사를 배웠다. 이 교수를 따라 문화재 현장을 무수히 답사했고 독일에서 살면서 잊었던 전통의 세계를 환기할 수 있었다.
송 작가는 스무 살이던 1972년 파독 간호사로 함부르크에 갔다. 현지 미술대학을 졸업해 화가로 활동했으며 고흐, 피카소 등의 영향을 받은 드로잉 작업을 주로 했다.
한국 방문은 작품 속에 항아리, 횃대 등의 한국적 소재가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2008년 전시 때 “한국의 붓도 사용해보라”는 이 교수 권유에 우리의 귀얄붓을 사가지고 갔다고 송 작가는 귀띔했다.
“추사 김정희가 못쓰게 된 붓으로 붓무덤을 만들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도 연습하고 또 연습했지요. 그래서 얻은 즉흥성을 이 교수님이 이번에 느낀 것 같습니다.”
그의 화폭은 이중적이다. 넓은 붓질은 추상과 구상의 이중효과를 내는 이점이 있다. 또 ‘즉흥적인 신명’과 ‘정적인 그리움’을 동시에 풍긴다. 한 획을 단숨에 긋는 작업은 한 순간에 온 몸을 다해야하는 일인데 이는 곧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오면서 말뚝을 박듯 정박하고 싶은 욕구를 담은 것일까. 그의 작품은 풀어진 흰 명주천이 안정감을 주는 바지랑대나 횃대에 걸려 있는 양식이 많다.
손영옥 선임기자
파독 간호사의 일필휘지 고향·어머니를 붓질하다
입력 2014-11-18 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