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세상 읽기] 메카로 가는 길은 없다

입력 2014-11-15 02:54

서양에서 즐겨 읽히는 무슬림에 관한 책이 있다. 무함마드 아사드의 ‘메카로 가는 길(The Road to Mecca)’인데, 이 책은 이슬람교를 이해하려는 서구인에게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최근에 국내의 한 출판사에서도 소개되었다. 저자는 1900년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가정에서 태어나 빈대학에서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26세가 되던 해에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파키스탄 건국에 깊숙이 개입하기도 하고 52세까지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이슬람교를 널리 알리기 위한 집필 작업을 추진해 왔다.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파키스탄에서 발행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빈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을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수년간 중동을 여행하다가 이슬람교에 매료돼 개종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개종 뒤 6년 동안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면서 사우디아라비이의 이븐 사우드 국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과 깊은 친분을 쌓기도 했다.

필자가 이 책을 읽게 된 일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서구인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이슬람교에 관한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라는 호기심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슬람교와 코란에 대해 객관적으로 설득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편집자는 “이 책은 1932년의 그의 마지막 사막 여행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한 유럽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고 동화되어 가는 과정, 영적 깨달음이 스며들어 있는 그의 필생의 명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를 갖고 읽었다.

우선 서구인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저자의 뛰어난 필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현대 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막 생활과 관련된 낭만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흥미를 끌 법한데, 여기에 더해 저자의 탁월한 글솜씨가 책에 푹 빠져들게 하는 묘미가 있다.

나는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봤다. 26세의 청년이 어떤 근거로 개종을 하였으며 왜 자신의 영혼 세계를 이슬람교에 맡기게 되었을까. 이를 독자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는 서문에서 책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이슬람교를 서구인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서구인은 왜 이슬람이 열등하다고 단정지을까? 이슬람을 직접 탐구하려는 시도라도 해봤을까? 그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멋진 글을 쓸 수 있을까”라 할 정도의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지나치게 ‘낭만적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리나 진리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자신의 삶이 행로를 결정하지 않았는가라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서구의 물질문명과 도회지 문명에서 염증을 느낀 사람에게 이색적인 사막 생활,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서도 매력을 느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자신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 이유의 한 단면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과 연결시켜 이렇게 말한다. “그 역시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을 때까지 방랑을 거듭했고,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인생의 본질과 현실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세상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자 했던 욕망을 아브라함이면 꿰뚫어보지 않았을까?” 이런 개인적인 성찰과 고민들이 이 책에는 자주 나오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 책 속에는 자신의 개종의 정당성을 입증할 만한 논거가 등장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고 끝까지 책을 읽었다.

그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자주 아랍 세계와 무슬림에 대한 호의를 표하는데 그 호의조차도 서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한 아랍인으로부터 호의를 받은 다음 그는 이렇게 고백하기도 한다. “이 사소한 에피소드 덕택에 내가 아랍 세계를 그토록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에게 빵을 나누어준 그 베두인 남자에게서 나는 자유로운 인간에의 숨결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구문명과 서구인의 대안으로 아랍 문명과 아랍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음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한다. “유럽인의 삶을 그토록 추하게 만드는 영적인 분열과 공포, 탐욕을 그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그동안 찾아 헤맸던 온갖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아랍인들에게 발견했다.”

책의 중간 중간에 이슬람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 생활이었다. 신학 체계라기보다 신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사회적 행동 양식이었다. 코란 어디에서도 ‘구원’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원죄’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이슬람의 근거가 되는 코란의 신뢰성을 입증할 만한 어떤 견해도 제시하지 못한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아랍인들은 이슬람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아브라함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코란 글귀를 살펴보면 무함마드 시대 이전부터 아랍인들의 정신 속에 그가 존재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결국은 구약의 상당 부분을 재조합에서 코란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등장한 당시의 기준으로 신흥종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덮으면서 젊은 날 내렸던 그의 개종은 오늘날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만든 신’을 선택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