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삶에서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피할 새도 없이 앞을 막아선 악을 마주하고 섰을 때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세상의 정의롭지 않은 일이나 악한 사안들의 비밀스러운 증인이 되는가.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오히려 수월하다. 그러나 어쩌다 우리가 악행의 증인이 되거나 나도 모르는 새에 그런 일에 연루될 때 우리의 신앙은 매우 의미심장한 출렁임을 경험한다.
시편 136편에서 취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다윗이 찬양하는 무한 인자한 하나님의 속성과 악 앞에서 준엄하신 공의의 사랑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파스칼은 아닐 지라도, 신앙인의 마음은 갈대가 되어 강안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흔들리게 마련이다. 궁극적인 결말을 하늘에 계신 주관자께 맡기고 눈을 감아버리거나 용서를 간구하며 얼굴을 돌려야 하나? 아니면 회복을 위한 첫걸음으로 신앙인의 기본적인 의무감을 가지고 악을 드러내야 하나.
독일의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의 주인공 페터 데바우어도 바로 이런 문제 앞에 직면해 있다. 작가 자신이 그렇듯이 주인공 페터도 법학과 출신이다. 그는 출판사의 법률담당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던 중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의 저자가 쓴 ‘법의 오디세이아’라는 제목의 번역 원고를 읽게 된다. 미국에서 출간된 저명한 법학자의 저서였다. 이 책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홀어머니와 사는 집과 스위스의 조부모 집을 오가던 평화로운 유년을 떠나 세상과 성공을 뒤로 하고 출판사 직원이 되어 법세계의 진실과 몇 여성과의 지지부진한 사랑 사이를 미미하게 오가던 페터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요청에 대해 처음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아버지의 실체에 대한 추적에 페터 자신이 뛰어들기 때문이다.
귀향에 관한 서사인 호머의 오디세이아를 패러디한 소설 속의 소설을 등장시키면서 ‘귀향’은 추리소설에 방불한 촘촘한 이야기의 꼬임과 진실을 추적하는 드라마를 뒤섞어 페터의 아버지의 과거를 밝혀낸다.
페터가 어릴 때 조부모의 집에서 읽은 대중소설의 저자였고, 전쟁 중에는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미국의 유명한 법학자가 된 존 드 바우어. 신분 세탁을 위해 애인에게 자신의 사망신고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버려질 애인과 아이에게 필요한 결혼증서를 써주고는 호적에서 사라져버린 이 남자가 바로 페터의 아버지다. 이 겹겹이 저질러진 악행의 실존 앞에서 페터는 오래 망설이지 않는다.
페터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 법학자의 세미나에 참여해 그의 현재를 파헤친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일종의 귀향이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악행은 이론을 낳는다. 존 드 바우어는 자신의 악행을 법 이론으로 정당화하며,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이론으로 해체하며, 자신에 대한 공격까지 매력적으로 호도할 줄 아는 교묘한 지적 능력으로 승승장구한다.
다시 독일로 돌아온 페터는 진실을 밝히는 원고를 ‘뉴욕타임스’에 보낸다. 원고는 잊혀졌다가 몇 년 뒤 한 기자에 의해 존 드 바우어의 이야기가 세계 언론에 일제히 실린다. 방송 대담 이후 이 법학자가 보여준 겸손과 솔직함과 다정함이 뒤섞인 인품과 카리스마가 공개되면서 그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진다. 악은 아주 친근한 어떤 것이 된다. 이 평범한 세상에서 어떻게 악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론으로 지속되고 번성하며 세상은 그에 찬사를 보내는지를 놀랍게 분석해 보여주는 이 과정에 슐링크는 소설의 중요한 후반부를 할애한다.
페터의 귀향, 법의 귀향, 소설 속 소설의 병사의 귀향, 모두 스산하고 씁쓰레하다.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며 진실을 밝혔다고 영웅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고 난 페터는 이미 이전의 페터가 아니다. 페터는 가짜 고향과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잃지만 그 대신 소설 끝에서 사랑을 얻는다. 올해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 슐링크의 ‘귀향’은 바로 이런 면에서 명민한 작품이며 모든 가치가 상투적으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진실을 위해 악을 드러내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음을 기독교 작가답게 예리하게 해부해 보여준다.
최윤<소설가·서강대 교수>
[최윤의 문학산책] 스산한 ‘귀향’의 진실
입력 2014-11-08 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