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우울과 우울증은 어떻게 다른가 (2)

입력 2014-11-08 02:59

지난 칼럼에서 우울과 우울증의 차이를 얘기했다. 우울증은 그저 우울이 심한 상태가 아니며 격이 다르다고 했는데, 기분만 아니라 몸의 리듬까지 변화가 오며 보통 우울할 때 통하던 해소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우울증의 치료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우울의 본질을 직면하는 것이고 둘째는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은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한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3∼26) 여기서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이 무엇인지는 22절에 나오는데 언뜻 보면 내용이 이상하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뭔가 그럴싸한 희망인 줄 알았는데 고작 완전히 망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 그렇게 큰 성실이란 말인가? 그런데 진정 우울증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은 그야말로 복음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우울로 인생을 마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싸한 멋진 포장의 희망보다 훨씬 실제적인 희망의 메시지이다. 진료실에서는 저마다 인생의 패배를 이야기한다.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으리라는 절망이 무겁게 개인을 짓누른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이 상태, 즉 멸망의 예감을 안다. 그래서 진멸되지 않음이 얼마나 중요한 선언인지도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적절한 약물치료를 처방하면 상당수가 이전의 어떤 노력에도 해소되지 않았던 우울증이 개선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그들에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우울증이 좋아졌지요?” 그들은 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느끼고 내게 말할 수 있다. “잡다한 생각들이 줄어들었어요” “잘 잤어요”가 자주 언급되는 보고이다. 약물학적으로는 몸의 세로토닌 수치가 정상화되어서 우울증이 낫는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가 잘 자고 생활 리듬을 규칙적으로 보내는 것이 세로토닌이 정상화된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기쁜 일이 없어도 억지로 웃다 보면 기분이 밝아지는 것과 흡사하게 당장 세로토닌이 정상적이지 않아도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면 몸이 제대로 된 리듬으로 움직인다. 매일의 약물치료는 매일의 운동과 같다. 아침마다 새로운 것을 통해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일어나는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히 보장된 변화인 것이다.

이는 우울과 우울증의 차이만큼이나 분명하게 대조된다. 우울의 해소법이 있듯이 우울증의 해소법이 있다. 우울의 해소법은 우울증에서는 안 통한다. 우울할 때 어떤 해소법을 쓰는지 생각해보면 각자 다양한 방법이 나올 텐데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신선한 자극’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변화가 기분을 일깨우는 셈이다. 그런데 우울증 단계에서는 사소한 변화라도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분을 악화시킨다.

우울증 단계에서는 신선한 변화가 아니라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하다. 잘 자고 제때 먹고 하루 일과를 정해진 일과에서 적절하게 몸을 써가며 부담 없이 보내야 한다. 잘 안 되면 약물치료를 해가며 다시 시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우울증이 아닌 우울한 기분에서 생활표를 짜가며 새로운 규칙적인 생활을 시도하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병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은 변화를 추구하며 우울증이 아닌 우울의 경우에서도 규칙보다 변화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우울과 우울증의 처방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명심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조언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우울의 해소법을 주거나 그래서 잘 안 나을 때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매도는 더 이상 안 하게 될 것이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