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경주제일교회]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폐하가 높으냐” 일제 핍박에 맞서다

입력 2014-11-08 02:53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경주제일교회. 오른쪽 석조건물은 6·25전쟁 중에 헌당됐다. 작은 사진은 정영택 목사.
1930년 경주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 졸업기념 사진
옛 경주제일교회 초가예배당 동쪽 경주읍성 잔존 성벽.
강주복(왼쪽)·김의진 원로장로가 경주읍성 내 첫 교회터 앞에서 경주제일교회 역사를 말하고 있다.
‘경주지방 노동교회(현 경주제일교회)는 연약한 교인들이 농업으로 근근 생활을 하나 십일조로 드리는 곡식을 쌓아두고 교역자의 봉급을 담당하며… 예배당 6칸을 잘 건축한 일도 있사오며 조선 독립 만세 사건으로 교역자와 교인 중에 구금당하여 교회에 해가 있을 듯하나 도리어 큰 믿음이 생겨 각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이 1070여원의 구제금을 내어 고생하는 가족을 구조한 일이 있다,’(1920년 1월 20일 제7회 경북노회 회록 중)

수학여행의 추억이 깃든 고도(古都) 경주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1902년이었다. 우리나라 첫 이민이 시작됐고 단발령이 시작된 해였다. 1886년 대구에 부임한 미국 선교사 안의와(James Edward Adams)가 대구를 중심으로 장날 노방전도를 펼쳤는데 이해 봄 경주 장날 노방전도에 나섰다. 그는 대구에서 경주까지 말을 타고 왔다.

첫 교인은 이남생·공연이 부부였다. 부부는 주일을 피해 모를 심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생원이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다른 집들보다 많은 벼를 수확하자 “이 생원이 믿는 하나님은 참 영험하구나”라고 칭송하게 됐다.

경주제일교회 첫 교회당은 경주읍성 내 성건동 197번지 초가였다. 이남생 부부와 경주제일교회 초대 교인들이 눈물과 기도와 근면으로 이룬 하나님의 집이었다. 당시 읍성은 1920년대 히트한 대중가요 ‘황성옛터’ 노래 가사만큼이나 ‘월색만 고요한 폐허’였다.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이었으며 그 조선의 정신 경주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예수 복음은 위정자들의 무능과 부패에 지친 백성에게 한 줄기 빛이 됐다.

이후 교회는 인근 안강제일교회 등을 개척하며 복음의 씨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왕도 경주는 불교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놓인 곳이라 전도가 그리 쉽지 않았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기성 종교와의 갈등을 피하고 신문화를 통한 복음을 정착시키기 위해 교육선교에 치중했다. 1909년 경주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는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을 잃었다. 그럴수록 백성은 ‘힘주시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로 몰렸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1919년 3·1운동 때 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된 만세 시위로 나타났다. 일경은 그 청년들과 박영조 목사를 투옥시켰다. 박 목사는 출감 후 일제에 의해 대구 남산정교회로 쫓겨나다시피 나가야 했다. 경북노회 회록에서 말하는 ‘조선 독립 만세 사건’이다.



고도 경주에서 복음이 뿌리 내리다

지난 3일 오전 그 성건동 197번지 앞에서 강주복(78) 김의진(74) 원로장로가 선대의 신앙을 추억했다.

“기록에 보면 1920년 온 교우가 힘을 모아 한옥 와가 165㎡(50평) 예배당을 완공했다고 나와 있어요. 그 교회 사진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그 예배당 터가 성문 남문 밖 노동동 176번지 지금의 경주제일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곳 197번지는 안의와 선교사 등이 개척한 첫 교회터이고요. 이 자리에 ‘경주 지역 최초 기독교 도래지’라는 표석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3대째 경주제일교회 장로 배출가(家) 김의진 장로 얘기다.

초가 예배당은 서문과 동문 중간쯤 위치했다. 지금은 성읍 사대문이 모두 사라졌다. 다만 동문터 남쪽으로 잔존 성벽만 남아 성곽 전체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석축읍성으로 둘레 2400m였다. 고려 왕건을 비롯한 역대 왕들이 안동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은 곳이다.

이 읍성은 아문(衙門)과 남루, 동·북쪽 성벽의 옛 사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교회 설립 무렵까지 어느 정도 형태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성읍 안 초가 교회와 남문 밖 교회는 그 ‘월색의 폐허’를 지켜본 셈이 된다.

교회는 남문 이전 이듬해 김익두(1874∼1950)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 등을 열어 60여명의 결실을 맺는 등 전도 열기를 이어간다. 예배당이 좁아 1923년 한옥 와가에 99㎡(33평)를 증축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에 대해 탄압에 나섰고 많은 교회가 지독한 핍박에 훼절했다. 경주제일교회가 소속한 경동노회는 1938년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다’라고 결의했고 제일교회도 이에 따른다. 그럼에도 일제는 민족교육을 시킨다는 이유로 계남학교마저 폐쇄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방을 한 달여 앞둔 1945년 7월 29일 주일예배를 방해할 목적으로 경보사이렌을 울려 양화석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킨다. 이에 교인 임오순 등이 거세게 항의하자 10여명을 구금한다. 이들은 광복절 이튿날이 돼서야 비로소 석방될 수 있었다.

이때 일경은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폐하가 높으냐?”라는 질문으로 교인을 괴롭혔다.



6·25 당시 석조예배당 건축 자재 징발

현 경주제일교회는 경주 중심지다. 교회 북쪽에 경주읍성, 동쪽에 경주역을 두고 있다. 1920년 이래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교회 시설 가운데 교육관으로 쓰고 있는 석조건축물은 준(準)근대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게 경주는 피란지였어요. 6·25전쟁 이듬해 목회하는 장형 때문에 이곳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고향(함경도 북청)을 떠나 마음껏 주일성수하며 살았어요. 전쟁 전 지금의 교육관은 본당으로 쓰기 위해 공사 중이었던가 봐요. 한데 전쟁이 터지자 교회 건축 자재를 군에서 징발해 갔어요. 짓다만 꼴이 됐지요. 불과 몇 십리 떨어진 안강에서 형산강 전투가 치열했으니 언제 교회가 무너질지 모를 때였지요. 피란민조차 멀리 부산 등으로 흩어지고 없을 정도로 민족이 바람 앞에 촛불이었죠. 교인들 심정이야 오죽했겠어요.”

강주복 장로의 기억이다. 그는 광복과 함께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탈출했다. 다행히 중형(둘째형)이 국군 장교여서 원산에서 목선을 타고 경북 포항으로 탈출했고, 다시 양륙함정 LSD를 타고 여수로 가 피란살이를 했다. 슈샤인 보이(구두닦이)를 하면서 지냈다. 강 장로는 “북청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세계 권투챔피언 김기수와 여수에서 같이 기거했다”고 회상했다.

경주에 정착한 그는 짐차(자전거)에 80㎏의 책을 싣고 하루 40㎞를 오가며 책을 팔았다. 교회 소년부(지금의 청년부 격)에 소속돼 주경야독한 그는 훗날 경주 중심가에 ‘광복서점’이란 번듯한 기독교 서적 위주의 책방을 경영해 사업에 성공했다. 고된 한 평생이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복된 한 평생이었다”라고 말했다.

강 장로는 여전한 남북 갈등에 대해 “남북대화에 방해가 될 정도의 삐라 살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몸으로 겪은 세대의 조언이다. 한국교회는 불행한 역사 속에서도 섬김의 전통을 이어온 이들에 의해 우리 사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왔다.



고난과 섬김, 건전한 한국 교회의 모델

교회는 시대를 안고 있고, 교회 구성원은 시대정신에 누구보다 충실해야 한다.

경주제일교회의 구한말 초대교인, 일제강점기 교인, 해방 전후 교인 등은 핍박 속에서도 늘 약자 편에서 맥을 이어왔다. 한국의 크리스천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었고, 그럴 때면 합심기도와 중보기도로 역경을 헤쳤다.

당회장 정영택 목사는 바로 이와 같은 선대의 유업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원칙을 양심에 따라 지켜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한국 장자교단 총회장에 선출된 정영택 ‘시골교회 목사’


경주제일교회 정영택(66·사진) 목사가 지난 9월 2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시골교회’ 목사가 한국의 장자교단 총회장이 된 것에 대해 1500여명의 교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체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정 목사의 자세를 교계가 높이 샀기 때문이다.


정 목사는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선언문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모습을 교회가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제일교회는 쇠락하는 비수도권 지방교회와 달리 영성을 바탕으로 한 섬김에 축복이 더해진 곳이다. 지역사회 헌신을 위한 구제 예산이 일반 교회보다 월등히 높다. 장애인 재소자 독거노인 등 소외된 이웃에게 형식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시간을 바친다. 유아·유치·어린이·청소년·청년부가 한국교회 평균에 비해 몇 배 활성화된 것은 하나님 방식의 응답 같았다.


경주=글·전정희 선임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