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내용은 “군대 간 아들이 인문학 책을 읽고 싶다고 하니 인문학 책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웃음이 피식 났다. 인문계 대학 졸업자의 90%가 취직을 못하고 논(론)다는 ‘인구론’이 유행어인 세태에서, 또 한편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는 ‘문화융성’의 근간을 인문학으로 설정하고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인문정신문화특별위원회’까지 출범시켰다. 인문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취업이 안 된다고 아우성이고, 또 한쪽에서는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요란한 것이다.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이기에 이 난리법석이란 말인가?
도리를 지키도록 의식화하는 게 인문학
인문학은 문·사·철 모두를 아우르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도리이다. 이렇게 말하면 인문학이 매우 거창하게 들려 “아니, 역사도 모르는데 언제 문학과 철학까지 공부해?” 하는 반문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철학도 그렇다. ‘철학’ 하면 소크라테스와 칸트와 헤겔이 떠오르니 어렵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한 권으로 읽는 인문학’이라는 당의정을 입혀 얄팍한 지식을 평이하게 짜깁기해 놓으면, 그것만 읽으면 소위 ‘인문학’을 다 알게 될 것인 양 그 책을 사서 읽는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인문학의 실체는 멀어지기만 하며 ‘안개 낀 장충단공원’에서 헤어진 애인 찾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인문학은 간단하다. 의대를 입학하려는 학생에게 의대 지원 동기를 물어보았다고 하자. 그 학생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지만 대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돈을 잘 번다고 해서, 둘째는 타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이다. 돈 잘 벌기 위해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것과 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가 되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한 가지 행위일 수 있다. 실제 의사를 보면 병을 고쳐주고 돈을 받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하는 의사와 이타적인 치료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의사의 의식과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후자의 삶을 선택하도록 인간을 의식화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사회 갈등 조절하고 공동 善 찾아내야
자동차를 만드는 것에도 똑같은 논리가 작용한다.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 현대기아차그룹에 가서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 돌아오는 답은 당연할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돈을 벌어서 뭐하는데? 임직원 월급 주고 세금도 내고 협력업체도 같이 먹고살고, 한전 부지도 매입하고…. 그런 이유로 현대기아차는 돈을 벌어야 한다. “한전 부지 매입해서 뭐하는데?”하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할까? 세계 초일류 자동차 메이커 진입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랜드마크를 세울 부지가 필요해서일 것이다.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면 뭐하는데? 이렇게 질문하면 대답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인간이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동과 수송 수단을 위해 자동차를 만든다고 하면 인문학적인 대답이다. 자동차 메이커의 목적이 인간 삶의 외형을 개선하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라고 기업을 의식화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왜 그렇게 의식화해야 할까? 그렇게 해야만 우리 공동체가 갈등을 조절하고 모두가 조금씩 행복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 인문학은 갈등 조절의 기제로서 태동했다. 믿는 신은 같건만 그 형식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신교와 구교는 16, 17세기 100년 이상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강행했다. 데카르트의 철학 이후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사유하고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 넓은 의미의 종교전쟁은 끝이 났다.
인문학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인간의 공동 선(善)을 찾아내야 한다.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사생결단으로 갈등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인문학은 본래의 역할을 할 것인가? 야심(夜深)한데 달빛조차 없다.
하응백 문학평론가·휴먼앤북스 대표
[청사초롱-하응백] ‘인구론’과 인문학의 역할
입력 2014-10-29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