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전산프로그램개발팀장 후보 중 네 명은 이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전산장교였다. 결코 내가 상대적으로 우수해 선발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청와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내 능력과 의지를 초월한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계획이었다. 하나님께서 10여년 전 내 발걸음을 인도해 청와대를 바라보고 꿈을 품게 하셨다. 또 수많은 연단과 훈련으로 나를 청와대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청와대로 인도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근무 시작 때부터 기도했다. 퇴근 후에는 청와대 관사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삼각산 능력봉에 올라가 산 기도를 드렸다. 어떤 때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새벽에 내려오기도 했다.
하나님은 내게 청와대에서부터 공의와 정의가 흐르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청와대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땅 밟기 기도’를 시작했다. 청와대 입성 후에도 ‘바라봄의 법칙’으로 통일 대한민국이 21세기 세계 중심 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국가 안보와 국정 지도자를 위해 기도했다.
6공 시절인 당시에는 청와대 안에서 공식적으로 기도회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구했다. 어느새 기도하는 직원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과 후에는 각 가정을 돌아가며 예배를 드렸고, 주말에는 산 기도 모임을 갖기도 했다.
결국 1992년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12가정이 모여 정근모 장로님을 모시고 청와대 인근 옥인교회에서 ‘청와대기독신우회’ 발기예배를 드렸다. 그해 10월 30일 청와대기독신우회를 창립했다. 매주 점심시간 인근 식당에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졌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다. 문민정부 시대가 열렸고, 대통령이 장로였음에도 청와대기독신우회는 마치 북한의 지하교회처럼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기도회와 월례예배를 드렸다. 문민정부 중반기 북한의 핵 위협에 국가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서 기도회에 탄력이 붙었다. 문민정부 2기가 됐는데 마침 김광일 비서실장과 김광석 경호실장이 각각 장로와 안수집사였다. 북핵으로 국가 안보에 위기가 닥친 것이 오히려 청와대기독신우회가 공식화되는 기폭제였다.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국가 안보와 지도자를 위한 기도회로 일과를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실 건물 지하 강당에서 주간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하며 기독 공직자들이 먼저 무릎 꿇고 기도했다. 일과 이후 저녁에 드리는 월례예배는 경호실 간부와 비서실 비서관, 행정관 등 100명 이상이 참석해 활력이 넘쳤다. 바라봄의 법칙이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청와대기독신우회 창립을 주도한 창립회원이었다. 또 청와대 근무를 마치는 순간까지 신우회장을 맡은 청와대기독신우회의 산증인이다. 언론에서 사실과 왜곡된 보도로 종교 간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기독신우회원들이 먼저 국가 안보와 국정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신우회 설립 목적과 본질에 충실했다.
청와대 주변에는 경호와 경비를 위한 군 장병과 경찰(전경)들이 근무하고 있다. 겨울에는 신우회원들이 조를 짜 경비 초소를 방문해 따뜻한 차를 건네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그러던 중 신학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한 병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 병사는 청와대 내에 사병이 예배드릴 곳도 없고, 종교활동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군종법을 보면 독립 대대급 이상 부대는 교회를 세울 수 있고, 군종목사를 파송받을 수 있었다. 최전방 부대까지 종교활동이 보장돼 있다. 그런데 청와대 근무가 오히려 신앙생활에서 역차별을 받고 있었다.
나는 청와대 내 고위층보다 청와대 주변에서 일하는 장병과 의경들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됐고, 그들이 종교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15) 6共 시절인 1992년 ‘청와대기독신우회’ 창립
입력 2014-10-24 02:30